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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즈 엔드> 지나간 시대와 다가올 시대 사이의 완충의 가치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원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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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소년이 여름 한 철 겪은 사랑의 열병을 통과의례로 받아들여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우아하게 묘사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정서적 뿌리는 제임스 아이보리가 연출한 작품들에 맞닿아 있다. (2020.09.03)

영화 <하워즈 엔드>의 한 장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의 재유행으로 신작 개봉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연기된 신작의 자리를 대신하는 작품 중에는 클래식의 지위를 획득한 재개봉 영화가 눈에 띈다. <하워즈 엔드>(1992)가 그렇다. <하워즈 엔드>를 연출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젊은 영화 팬들에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각색자로 더 유명하다. 열일곱 살 소년이 여름 한 철 겪은 사랑의 열병을 통과의례로 받아들여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우아하게 묘사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정서적 뿌리는 제임스 아이보리가 연출한 작품들에 맞닿아 있다. 

마거릿(엠마 톰슨)과 헬렌(헬레나 본햄 카터)은 사이좋은 자매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집안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예술에 관심 많은 둘의 지적인 대화로 생기가 넘친다. 자매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건 윌콕스 가문과의 인연 때문이다. 윌콕스 가문의 수장 헨리(안소니 홉킨스)는 마거릿을 경계한다. 세상을 떠난 아내가 마거릿에게 가문의 집 ‘하워즈 엔드’를 유산으로 남겨서다. 남의 가문 사람에게 집을 넘기기 싫었던 헨리는 마거릿의 의중을 파악하려다가 그녀가 마음에 들어 청혼하고 결혼에 성공한다. 

헬렌은 언니 마거릿이 헨리와 결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헨리가 책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다. 헨리는 헬렌의 지인이 근무하는 보험회사가 재정 건전성이 약해 곧 없어질 거라며 이직을 권유했고 헬렌은 이를 지인에게 알려 헨리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없어지지 않았고 헬렌의 지인만 잘 다니던 일자리를 잃었다. 헬렌은 헨리를 찾아 이를 책임지라고, 헨리는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냐고 줄다리기하는 가운데서 마거릿만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러면서 자매 사이가 멀어진다. 

영화의 배경은 1910년대, 도심에는 초기 형태의 자동차들이 달리고 기차가 전 지역을 연결하는 가운데 시골에서는 여전히 말과 마차가 교통수단으로 애용되는, 19세기 끝자락과 20세기 초입의 가치가 완전하게 자리바꿈하지 못한 채 어지럽게 공존하는 일종의 물질적, 정신적 혼란의 시기이었다. 음악 공연 현장에서 연주자는 ‘고블린’의 단어를 통해 공포와 허무를 연주하고 헬렌의 아내 루스(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살아생전 마거릿과의 티타임에서 여기저기 공사 중인 런던이 싫다며 녹음에 둘러싸인 하워즈 엔드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루스의 죽음으로, 그리고 헨리와 그의 자식들이 마거릿에게 하워즈 엔드를 넘기라는 루스의 유언을 폐기하면서 하워즈 엔드는 주인 없는 집이 된다. 공석이 된 하워즈 엔드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 그의 결말을 향해 가는 <하워즈 엔드>는 그를 통해 서로 다른 세기의 가치가 혼재하여 부딪히고 갈등하는 과정이 어떻게 해결되고 자리 잡는지를 은유한다. 그러니까, 극 중 하워즈 엔드는 세기와 세기를 연결하는 안착의 장소이면서 ‘엔드 end’의 의미를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삼는 출발의 신호인 셈이다. 

워낙 유명한 E. M. 포스터의 소설이 원작이고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과 각색상과 미술상을 받았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기도 한 작품이라 스포일러 표기 없이 밝히자면, 하워즈 엔드의 주인이 되는 이는 마거릿이다. 마거릿은 헨리와 헬렌 사이에서 둘의 갈등을 중재하느라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돈과 명성을 제일로 치는 헨리와 인간에 대한 책임 의식을 삶의 철학으로 삼는 헬렌은 각각 물질주의로의 급속한 변화와 이에 저항하듯 정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두 가치의 충돌이 두드러진 극 중 1910년대의 풍경을 반영한 듯하다. 


영화 <하워즈 엔드>의 포스터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에 단호한 헬렌, 헨리와 다르게 유연하고 낙천적인 마거릿은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의 가치를 모두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은 그 이전의 핵심이던 가치를 지우고 거기에 전혀 다른 가치를 그리는 게 아니라 기존의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더해 역사로 쌓는 데 의의를 둔다. 그럼으로써 버릴 건 버리고 계승할 건 계승하고 또한 거기서 파생한 새로운 가치를 시대정신으로 삼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워즈 엔드>가 마거릿을 내세워 역설하려는 바다. 

손님들을 불러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마거릿은 식사 자리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두고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자 이런 얘기를 한다. “토론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죠.” 엇갈리는 사안을 두고 자기주장만 앞세워 반목하는 건 변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 변화하더라도 역효과만 크다는 걸 알기에 마거릿은 중재자로 나서 혼란의 시간을 유예한다. 급속한 변화 대신 완충하는 시간을 가져 양쪽의 상처를 최소화하겠다는 마거릿의 태도는 발표된 지 30여 년이나 된 <하워즈 엔드>가 지닌 여전히 유효한 영화적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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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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