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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련의 엇갈린 관계] 우리가 잠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

<월간 채널예스> 202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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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 거하느냐는 한 사람의 소속과 정체성이 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직업은 직업 현장이 아닌 일상에서도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이름표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을 이용하기도 한다. (2020. 08. 05)


우리는 장소에 묶인 채로 살아간다. ‘회사에 있는 나’가 극장에 가면 ‘극장에 있는 나’가 된다. 그러면 내 위상도 같이 변한다. ‘회사에 있는 나’는 그 회사의 일원이지만 극장에 있는 나’는 관람객이다. 학교에 가면 학생이 되고, 가게에 가면 소비자가 된다. 우리에겐 어느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취해야 할 역할, 입장, 태도 등이 주어진다. 당연히 어떤 장소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 장소에 알맞게 배치된다. 집에 있는 부모와 자식, 학교에 있는 교사와 학생, 회사에 있는 동료와 상사, 식당에 있는 종업원과 손님.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 맞는 규칙과 예의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다. 원칙적으로 그렇고, 그렇기만 하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 덜 복잡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금 내가 있는 장소에서 부여된 역할만 할당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곳에 거하느냐는 한 사람의 소속과 정체성이 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직업은 직업 현장이 아닌 일상에서도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이름표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 사람들은 간혹 공정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식당에서 사장 대우를 받고자 하는 어느 기업의 사장은 옳지 않다 하면서, 학교에서 학생인 자기 딸에게는 집에서도 내내 학생으로 있으라고 하는 것처럼. 

사실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직업 이외에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복잡한 관계들이 연루되고, 더구나 현대사회는 자본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거의 대부분 상품과 소비자의 관계로 환원되어 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다양한 차원에서 심도 있는 연구와 더불어 접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우리가 각자 한 번쯤 이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겠다. 가장 축소된 사적 영역이라면 가족, 친구, 연인 등 친밀하고 내밀한 관계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관계 속에도 각자가 다른 장소, 다른 위상에서 부여 받은 역할이 겹겹으로 쌓여 얽혀 있음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소위 승승장구할 때는 넘쳐나던 친구들이 곤란에 빠지자 다 사라지고 없다는 한탄이나 딱히 내세울 게 없어서 친구나 친지를 만나기 어렵다는 아쉬움은 굳이 상담실에서 찾지 않아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집에 사는 가족끼리도 서로를 단지 자기 가족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관계 속 위상과 가치에 따라 대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에 클리세처럼 나오는 에피소드처럼 말이다. 직장을 잃거나 시험에 실패하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의 모습. 아픔을 겪을 때 위로를 받기 위해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집이 아닌가, 궁지에 몰렸을 때 내 편에 서주는 사람이 가족이 아닌가. 하지만 현실 속 우리는 종종 집에서조차 자기 가족을 기다리지 않고, 과장님을 기다리거나 수험생을 기다리거나 한다. 

물론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위상에서 벗어난 한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만나고 관계 맺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지향되어야 할 이상적인 관계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끔 혹은 꼭 필요한 순간에는 그런 만남이 성사되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어떤 배경이나 위치에 의해서가 아닌,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간절히 요구되는 위급한 순간에,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누군가를 믿고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곳이 명명되고, 의미가 부여되어, 역할이 할당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만나야 그런 것들에서 잠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실 정답은 없다. 필자의 바람은 우리가 각자 자신의 삶에서 그런 순간들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간혹, 그리고 잠시 우리가 서로를 어떤 자리에도 묶이지 않은 그냥 내 옆에 있는 사람으로,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어떤 자리에 있거나, 어떤 역할을 해내서가 아니라 그저 나이기에 내 가족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을 삶 속에 끼워 넣었으면 좋겠다.  

다만 필자가 만난 그런 순간을 소개할 수는 있겠다. 그건 이동하는 순간, 길 위에 있는 순간이다. 특히 너를 만나기 위해 서성이거나 달려가는 길, 혹은 함께 걸어가는 길.     

프랑스 낮 병원에서 만난 12살짜리 조현병 환자 다비드(가명)는 여러 이유로 기억에 남는 아이다. 병원에서 가장 말썽이 심했던 아이였는데 나는 병원을 떠나던 날, 그 아이에게 어깨와 등을 꽤 오래 맞았다. 집에 가려고 나갔던 아이가 되돌아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때리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매일 아침 병원 앞에 마중 나와 내가 오기를 기다려주었던 아이이기도 하다. 병원 앞을 서성이면서 길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오는 게 보이면 달려와서 맞아 주었다. 당시 결벽증이 있던 내가 잘 씻지 않고 다니던 다비드와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그 순간들이 준 선물이지 않을까 싶다. 병원 안에서 부여되는 각자의 역할을 맡기 전에 우리에게 잠시 주어졌던, 그냥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환대해주는 순간. 누군가를 마중하는 사람은 있던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오지만, 다른 장소를 향해 가지는 않는다. 이동은 이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 된다.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 마중하기다. 

지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도 그런 이동에 속한다.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있다가 친구 전화를 받은 지인이 ‘어디야?’라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너 어디 있는데?’라고 되물은 후 바로 찾아갔던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대뜸 ‘어디야?’라고 묻는 건 심상치 않다는 거다. 그때 지인이 자기가 있는 곳을 말했다면 전화 건 친구는 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거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이 있는 상태에서 먼 거리를 단번에 달려가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보통은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묻고 위로하는 수준에서 역할을 다하게 된다. 자신이 있는 장소에 머무르는 채로 움직이지 않고. 하지만 지인은 친구의 부름에 바로 길 밖으로 나왔다. 자기가 있던 장소와의 관계를 잠시 놓은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와 주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세상이 정해준 자리가 아닌 곳에서, 내 옆에 나를 위해 존재하는 친구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는 분가한 자녀 가족이 첫째 아들의 기일에 부모님 집에 모여 보내는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 현실 속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한 가족이지만 각자 다른 삶의 영역 속에서 맡은 역할과 경험들이 있고, 오랜만에 모인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그런 것들은 쉽게 놓아지지가 않는다.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지만 영화 속 대사처럼 조금씩 어긋나거나 한발씩 늦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가족이 잠시나마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만나는 순간은 밖으로 나와 함께 길을 걸을 때이다. 큰아들의 무덤을 찾아가고, 바닷가를 찾아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 가족을 배웅하는 길. 집 안에서는 각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던 가족, 함께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눌 땐 잘 맞추어져 가는 듯 하다가도, 서로 어긋나던 가족이 같은 길 위에서 같은 일(걷기)을 하면서 같은 곳을 향해 간다. 모두 자신의 장소에 묶이지 않고 놓여나 옆 사람과 함께 있게 되는 탁월한 순간이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거나 같은 편에 있다는 것을 암시할 때 왜 ‘우리가 같은 집에 있다’거나 ‘같은 방에 있다’고 하지 않고, ‘같은 길을 걷는다’거나 ‘같은 길 위에 있다’ 혹은 ‘같은 배를 타고 간다’고 할까? 한 장소에 머물면, 말 그대로 우리는 사람과 함께 하기보다 그 장소에 정박하게 된다. ‘동상이몽’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같은 침대에 누우면 다른 꿈을 꿀 수밖에 없다. 이 장소를 떠나 아직 다른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동하고 있는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잠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때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찾아가거나 기억하게 된다면 세상이 정해준 자리를 맡은 자로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로서 서로를 만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장소에 자신의 안정된 자리를 마련하는 일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거나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도록 애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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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수련(정신분석학 박사)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에서 정신분석 임상을 실천하고 있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썼고,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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