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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8월 우수상 - 롱패딩 맡기기 좋은 날씨네

여름을 맞이하는 나만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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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여름이 오면 나는 겨울 외투를 한 무더기 들고 세탁소를 향한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양팔 가득 안은 나는 아주 조금 움츠러든다. (2020.08.05)

언스플래쉬

SPA 브랜드에서 10만 원 주고 산 가성비 좋은 남색 롱패딩, 취직 후 '대학생 때 입었던 걸 입을 수 없다'며 백화점 할인 매대에서 산 아이보리색 코트, 어디서 샀는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어쩐지 없으면 허전한 무스탕…

낮 최고 온도가 30도까지 오른 어느 날, 완연한 여름이 오면 나는 겨울 외투를 한 무더기 들고 세탁소를 향한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양팔 가득 안은 나는 아주 조금 움츠러든다. 팔을 한껏 높이 치켜들고 롱패딩이나 롱코트 같은 것들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조심조심. 겨울이 떠난 지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팔뚝에 닿는 털옷의 감촉은 어쩐지 생경하다.  

“지금 맡길 수 있을까요?"   

겨울 외투를 들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세탁소 주인에게 말을 건넨다. 그 순간 에어컨을 켜 둔 탓에 찬 공기가 느껴지고, 세탁소에 걸린 린넨 재킷이나 반팔 셔츠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 나는 더욱더 어색한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나는 남몰래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나를 '추운 나라에 살다가 입국한 사람'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지구 반대편에서 사느라 방금까지 패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라고 여기며, 혼자 느끼는 어색함을 없애본다.

세탁소 주인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내 옷을 이리저리 살핀다. 나는 매번 검색해봐도 까먹는 세탁기호 같은 것과 군데군데 묻은 얼룩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급한 건 아니죠?"라고 묻는다. 대개 세탁소 주인들은 '왜 겨울옷을 이제 맡기냐'는 타박 대신, 이렇게 말하곤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 옷은 지금 입어야 할 게 아니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말인데, 결국 나는 조금 멋쩍어져서 "네네 다 되면 천천히 연락 주세요"라고 답한다. 

아무도 묻지 않지만, 세탁소를 나서며 이 게으른 행위에 나름의 변명을 해본다. 아, 일단 변명 전에 말하면 나는 게으른 사람은 맞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MBTI 게으름 3대장' 중 1개인 MBTI 유형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행위를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기엔 좀 아쉽다. 겨울 외투를 맡기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혹시 입게 될 수도 있어서다. 갑자기 추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세탁을 끝낸 옷을 다시 꺼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방심하면 오는 심각한 꽃샘추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설마 그럴 리 없다'며 옷을 맡기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오는 법이다.

결국 매년 절대 입을 수 없다고 확신할 때쯤 옷을 맡기게 된다. 내 나름대로 불확실성이 모두 제거되는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낮 최고 기온이 30도가 넘는 6월에는 아무리 추워지더라도, 롱패딩을 입을 정도의 한파는 오지 않으니까.

계절의 흐름보다 확신의 흐름이 더 중요한 나는 다른 일에서도 종종 비슷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 결과, 이따금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의문을 표한다. 왜 퇴사하고 싶다면서 회사에 있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고. 왜 겨울이 한참 지났는데 가만히 있느냐는 지적이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딱히 할 말이 없어진다. 나도 나대로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에게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온갖 아이디어를 생각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겨울 외투를 꼭 겨울이 지나자마자 정리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너무 일찍 했다가, 다시 겨울옷을 입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직 나는 좀 더 확실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결국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겨울옷을 맡기게 될 거라고 믿어본다. 남들에겐 게을러 보일 수 있겠지만, (게으른 것도 맞지만) 어쨌든 내 나름의 확실성을 추구하고 있는 거라고

세탁소에서 돌아오는 길, 30도가 넘는 날씨에 겨드랑이엔 땀이 맺혔다. 아, 당분간은 롱패딩을   입어야 할 날이 절대 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제 비로소 나의 여름이 시작됐다.    


한민선 이제 날카로운 글보다는 따듯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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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원희(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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