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표정훈 칼럼] ‘틈나는 대로 조금씩’ 쓰기

<월간 채널예스> 2020년 8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너무 극단적인 사례라 이걸 본받긴 어렵겠지만 에릭 호퍼는 금 시굴자, 식당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조금씩’ 책 읽고 글을 썼다. (2020. 08. 03)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버트런드 러셀이 가장 경애했던 친구가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크롬턴 데이비스로, 러셀보다 4살 연상이다. 데이비스는 변호사로 일했다. 러셀은 데이비스가 자신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자, 가장 친절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라 말했다. 데이비스는 가식적이고 화려한 것, 뭔가 거창하고 앞서가는 듯이 보이는 것들을 무던히도 싫어했다.

데이비스는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필생의 저서 원고를 틈나는 대로 조금씩 집필해나갔다. 변호사 일에서 은퇴한 뒤에는 그 원고를 마무리 짓는 데 전념할 작정이었다. 마침내 완성 단계에 가까워졌을 때, 집에 불이 나 원고가 다 타버리고 말았다. 데이비스의 실망은 절망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절망에선 다소 회복됐지만, 데이비스의 책은 결국 나오지 못했다.

복사기도 없고, 디지털 파일 시대도 아니었으니 원고가 불타버리거나 원고를 잃어버리나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써서 별도의 부본(副本)을 만들어두는 작가들도 있었다. 주로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이 부본 작성을 맡지만, 형편이 넉넉한 작가는 서기(書記)를 고용하기도 했다.

물론 요즘도 작업 중이던 파일이 그야말로 ‘날아가 버려서’ 낭패를 겪었다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러니 원고 파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들여도 지나치지 않다. 글을 써서 생계를 잇는 작가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작성 중인 원고 파일을 이메일, 클라우드, 외장하드, USB 등 네 곳에 저장한다. 예전엔 프린터로 출력까지 해두었으나 이젠 거기까진 안한다.

크롬턴 데이비스의 사례에서 내가 새삼 깨달은 글쓰기에 관한 교훈은 ‘원고 파일 지키기’의 중요성도 중요성이지만, 글 쓸 수 있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인 크롬턴은 필생의 저작을 어떻게 써나갈 수 있었을까? 앞부분에서 내가 ‘틈나는 대로 조금씩’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틈’을 내는 것과 ‘조금씩’이라도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분명한 주제를 정해야 한다. 어떤 주제에 관해 그야말로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면 가장 좋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집중할 수 있는 주제가 필요하다. 자신이 있으면 흥미는 저절로 따라온다. 주제가 거창할 필요도 없다. 맛있는 걸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면 그 맛있는 것들에 관해 써도 좋다. 막연히 ‘뭐 좀 써봐야지’하는 식으로는 글쓰기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둘째, 1분이든 5분이든 30분이든, 매일 매일 글쓰기 루틴을 지켜야 한다. 저녁 모임을 늦게까지 갖고 귀가하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 약속 장소에 좀 일찍 도착한 덕분에 갖게 된 길지 않은 시간, 화장실에서 한숨 돌리는 잠깐의 시간. 그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이어도 좋다. 그야말로 잠시잠깐이라도 매일 매일 쓰는 게 중요하다. 노트북 펼치고 좌정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휴대폰 메모 기능이면 충분하다.

셋째, 처음부터 완결성을 갖춘 제법 긴 글을 쓰려하지 말자. 처음부터 글의 얼개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메모 몇 줄이어도 좋다. 원고지 한두 매 정도여도 좋다. 하루하루의 메모 몇 줄과 원고지 한두 매가 쌓여서 글이 되고 책이 된다.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얼핏 떠오른 것을 메모로 붙잡아 두면, 그것이 단서가 되어 생각이 더 나아갈 수 있다.

너무 극단적인 사례라 이걸 본받긴 어렵겠지만 에릭 호퍼는 금 시굴자, 식당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조금씩’ 책 읽고 글을 썼다.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쓴 첫 저서 『맹신자들』(이민아 옮김, 궁리)로 전국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1세기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는 책읽기 가장 좋은 곳으로 침상, 말안장, 그리고 화장실을 들었다. ‘틈나는 대로 조금씩’ 글쓰기 좋은 곳도 마찬가지다.



맹신자들
맹신자들
에릭 호퍼 저 | 이민아 역
궁리출판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표정훈(출판 칼럼니스트)

출판 칼럼니스트, 번역가,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쓴 책으로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의 책』 등이 있다.

맹신자들

<에릭 호퍼> 저/<이민아> 역11,700원(10% + 5%)

극단적인 믿음을 지닌 맹신자들의 심리를 파헤치다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 에릭 호퍼는 일하는 틈틈이 맹신 현상에 대한 글을 썼고, 이 대표작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저자는 종교운동, 사회혁명운동, 민족운동 등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밝히고자 했다. 초기 기독교 운동부터..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예전에 하던 대로, 그냥 하면 안 된다

데이터 분석가 송길영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의미와 욕망이 있다”고 전한다. 우리가 소셜 빅데이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봄으로써 이 다음 시기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 10년 간의 과거를 톺아보고, 미래를 그려본다.

소설가 황정은의 첫 에세이

소설가 황정은의 첫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일기 日記』라는 제목처럼 작가의 어떤 날들의 기록을 담아냈다. 코로나19로 달라진 하루와 조카의 낙서에 대한 일상의 에피소드부터 차별과 혐오, 아동 학대, 그리고 세월호에 대한 마음까지. 반짝이는 문장들로 사랑과 위로를 건넨다.

철학자와 함께 현명하게 살기

이 책은 간결하고 명쾌하며 깊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칠 수 있는 관계, 심리, 정치, 경제 등 130여 개 문제에 관해 사상가들의 사유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끊어 읽어도, 한 번에 몰아서 읽어도 좋다. 철학은 삶에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뉴욕 할렘 배경의 매력적인 범죄극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니클의 소년들』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장편소설. 『할렘 셔플』은 뉴욕 할렘을 배경으로, 평범한 가구 판매상이 강도 사건에 휘말리면서 범죄의 세계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다. 할렘에 거주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낸 강력한 이야기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