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윤덕원 칼럼] 오렌지 피구공 (Feat. 김사월 - 오렌지)

황유미 『피구왕 서영』 김사월 <로맨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느긋하고 급하지 않은 허밍이 좋다. 주변의 시선이나 압박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박자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 걸음걸이는 경쾌함을 잃지 않는다.(2020. 06. 23)

언스플레쉬


어렸을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나는 집으로 바로 돌아오곤 했다.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노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왠지 집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때는 (90년도 중반) 텔레비전 방송은 낮 시간에는 잠시 멈추고 학생들이 하교한 뒤 늦은 오후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오후 시간대의 방송은 주로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는데, 특히 만화영화의 인기가 대단했다. 전통의 KBS와 MBC도 명작 만화들을 많이 방송했지만, 그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SBS의 기세가 무서웠는데, <축구왕 슛돌이>, <슈퍼 그랑죠>, <피구왕 통키> 같은 만화를 보기 위해서 일찍 들어가는 친구들이 많았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황유미 소설집 『피구왕 서영』을 처음 보고 그 시절이 문득 떠오른 동년배들이 많을 것이다.

만화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90년대는 피구의 시대였다. 『피구왕 서영』 에 나오는 것처럼, 피구는 여학생들의 체육경기 종목으로 많이 채택된 것은 물론이고, 축구나 농구 같은 주류 운동경기에서 처지는 남학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체력이 약하더라도 공을 따라 죽어라 뛰지 않아도 되는 운동이었고, 거칠게 몸을 부딪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적당히 묻어가면 되는 것이 피구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공을 던져서 다른 목표물이 아닌 ‘사람’을 맞추는 경기라는 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또 공격당할 위험이 없는 외야에서 일방적으로 내야를 공격하는 것,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공격자의 관심을 받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거나 혹은 맞서서 공을 잡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치열하고 살벌한 인간관계의 일면을 나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구왕 서영』은 새 학교에 전학을 간 서영이 동급생들 사이에서 생기는 권력관계와 서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어내고 극복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서영은 전학 간 학교에서 새롭게 관계를 맺고 소속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짝이 된 윤정에게 호감을 갖지만, 피구경기에서 활약한 까닭에 교실 내부의 권력관계의 정점에 있는 현지에게 관심을 받게 된다. 서영은 현지와 그 친구들에 동조해 주며 편안함을 제공받지만 윤정을 배척하고 교실 내의 권력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그들에게 마음속으로는 불편함을 느끼고 내적인 갈등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피구는 현지와 그 패거리들과 가까워지는 매개가 되는 한편, 윤정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서영은 윤정과 더 가까워지면서 현지 패거리와 함께 있을 때는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열게 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 한다. 좋아하는 일을 즐거워서 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한다면 정말로 ‘ㅇㅇ왕’ 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서영은 현지가 선심 쓰듯이 지어준 별명이 아니라 정말로 피구왕이 될 지도 모른다. 

『피구왕 서영』과 함께 듣고 싶은 오늘의 노래는 김사월의 ‘오렌지’ 이다. 윤정과 함께 먹은 오렌지를 기억해 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서영의 표정이 떠오르는 노래. 느긋하고 급하지 않은 허밍이 좋다. 주변의 시선이나 압박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박자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 걸음걸이는 경쾌함을 잃지 않는다. 서영이 친구를, 피구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차린 것처럼,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상큼하고 달콤한 기운이 나른하게 퍼져나간다. 

잘 지내보이겠지

너도 그 생각하겠지

너와 먹은 오렌지 

너도 그 생각하겠지

오- 사랑하는 건 너무 쉬워

소설집 『피구왕 서영』은 피구왕 서영’, ‘물 건너기 프로젝트’, ‘하이힐을 신지 않는 이유’, ‘까만 옷을 입은 여자’, ‘알레르기’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인’ ‘피구왕 서영’과 조금 결은 다르지만 가족이나 집단 속에서 당연한 듯 적응하지 못하고 그러기를 거부하는 예민한 개인의 자각이 주로 담겨있는데, ‘물 건너기 프로젝트’ 의 속 시원한 결말도 꼭 확인해 보시기를 바란다. 



피구왕 서영
피구왕 서영
황유미 저
빌리버튼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윤덕원

뮤지션. 인디계의 국민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1대 리더. 브로콜리너마저의 모든 곡과 가사를 썼다.

피구왕 서영

<황유미> 저10,800원(10% + 5%)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즉 가장 먼저 접하는 사회적 집단인 가족부터, 학교, 회사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자리를 잡아간다. 하지만 누구나 이 집단에 안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집단의 성질과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혹은 집단이 추구하는 방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표류하고 마는 것이다.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피구왕 서영

<황유미> 저8,400원(0% + 5%)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집단 속 관계의 정렬과 그 안의 실태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다. 사회는 단순하리만치 약육강식의 형태를 띠고 있다. 관계 안에서 약자는 강자의 눈치를 보고 살아남으려 애를 써야 한다. 이것은 회사생활이나 군대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는 가족,..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