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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월간 채널예스> 202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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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에는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나중에는 즐거울 수도 있겠구나.(2020. 06. 05)

언스플래쉬

살갗이 따가워.

햇빛처럼

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중략)

서 있는 얼굴이

앉을 때

누울 때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 김행숙 시집 『타인의 의미』 중 ‘타인의 의미’ 중에서


나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게 두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도 싫어서다. 처음 한두 번은 권유지만 다음부터는 강요가 되니까. 하기 싫은 걸 여러 차례 거절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간절히 원하는 게 아니고서는 두 번 이상 권하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원하는 걸 상대도 함께 원해야 더 즐거우니까. 나이가 들수록 자꾸 비슷한 사람만 만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요즘 일상을 떠올려보면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과 잘했다 싶은 일이 한 가지씩 있다. 하나는 동생 생일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부터 비가 죽죽 내렸고 동생의 기분은 그만큼 흐렸다.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에 갔다. 몇 주 전부터 잔뜩 기대했던 터라 동생의 컨디션이 아쉽긴 했지만, 레스토랑 분위기가 좋았고 음식 맛도 더없이 훌륭해서 무거웠던 분위기가 차츰 풀어졌다. 귀여운 한입 요리부터 성게알을 올린 참치, 아스파라거스 수프, 구운 가지와 생선, 스테이크와 예쁘고 특이한 디저트까지 코스는 적당한 속도로 이어졌고 순서대로 사진을 찍으며 점점 신이 났다. 그러다가 문득 동생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생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조심스레 물었다.

— 오늘 예쁜데 사진 좀 찍을까? 싫으면 얼굴은 안 나오게 찍을게.

— 아냐 괜찮아. 별로 안 찍고 싶어.

그래 뭐, 억지로 찍을 필요는 없지. 결국 음식 사진 너머 초점이 나간 희미한 실루엣의 사진 한 장만 남긴 채… 식사를 마쳤다.

돌아오는 길엔 비도 오고 몸이 찌뿌둥해서 함께 마사지를 받았다. 집에서 가깝고 제일 저렴한 곳을 골랐던 거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웬걸, 마사지는 훌륭했다. 나는 동생에게 “이 한 시간을 온전히 즐겨야 해, 절대 잠들지 마.” 단단히 일러두고는 이십 분도 안 돼서 코까지 골며 잤다고 했다. 깔깔대며 건물을 빠져나오자 슬슬 해가 떴다. 문득 레스토랑에서 찍지 않은 사진이 아쉬워졌다.

— 아, 아까 사진 찍을걸.

— 그러게? 찍을걸. 괜히 안 찍는다고 했네.

‘뭐라고? 이 자식이…?’는 아니고, 동생의 대답을 듣고 나니 정말 심각하게 아쉬워졌다. 일 년에 하루뿐인 날인데 사진 한 장 없다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면 되고 마음에 들면 오랜 시간 남을 테니 얼마나 좋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살다 보면 타인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 순간이 매번 부담스러웠다. 아르바이트를 할 땐 새로 온 이에게 일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고 회사에 다닐 땐 신입이 들어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사수(!)가 되어 거의 졸도할 뻔했다. 나조차도 납득가지 않는, 억지로(또는 의미 없이) 해야 하는 많은 일을 알려주는 게 괴로웠다. 그래서 일상에서만큼은 최대한 강요하거나 강요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권할 때는 있지만 상대가 원치 않으면 바로 회수했다.

얼마 전 애인과 길을 걷다가 작은 흑백사진관을 발견했다. 옛날 교복을 입고 다양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이 문 앞에 가득 붙어 있는 걸 보니 문득 나도 찍고 싶어졌다. 애인에게 같이 찍자고 말하자 싫다기에 혼자 찍기로 했다. 교복을 입었는데 생각보다 귀여워서 다시 한번 찍자고 말했지만, 애인은 역시나 괜찮다고 답했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고집을 부렸고, 결국 함께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섰다. 셀프로 사진을 찍고 고를 수 있어서 편했고 사장님의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보정 실력까지 더해져 만족스러운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사진관을 나오며 “찍길 잘했지?” 묻자 애인은 신이 난 얼굴로 “왠지 오글거려서 싫었는데 막상 찍으니까 좋다.”고 말했다. 그때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나중에는 즐거울 수도 있겠구나. 사람 마음이란 게 한결같을 수 없고 한 겹일 수도 없는 거니까 때로는 타인을 통해 마음이 한 꺼풀 벗겨지거나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매번 그럴 수는 없겠지만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도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

아쉬워하는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찍기 잘했다는 애인의 표정을 보며 가끔은 고집을 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에서 알 수 없는 저 먼 곳을 보면서, 한 번 더 용기 내고 두 번 더 권해서 좋은 시간과 추억을 쌓을 수 있다면야. 소중한 타인의 살갗을 느낄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시간은 아주 느리면서도 빠르게 지나가니 말이다.

오늘은 괜찮다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집에 데려왔다. 빔프로젝터로 함께 드라마를 보는데 할머니가 꿈만 같다고 말했다. 나랑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드라마를 보다가 편안한 표정으로 낮잠을 자는 할머니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충만한 시간이었다.



타인의 의미
타인의 의미
김행숙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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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백세희(작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경도의 우울증)와 불안장애를 앓으며 정신과를 전전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지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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