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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75화 : 경성에서 연락이 왔어요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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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옛날 화요회와 상해파의 선배들을 다시 불러 모았습니다. 그분들은 일찍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변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2020.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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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층에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박선옥이 말을 꺼냈다.

 

 “경성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일 저녁 일곱 시에 사람이 온다구요.”

 

 “누가 오는데……”

 

 “그건 저도 모르죠. 약속 장소를 말하시면 저는 전해주면 되어요.”

 

이철은 잠깐 생각해 보고 대답했다.

 

 “만국공원 성공회 교회당 부근 산책로가 좋겠군.”

 

박선옥이 연락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 이철은 김근식에게 찾아가 보고했다. 그는 이철의 말을 듣고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는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경성의 연락이라면 이관수 동무가 보낼 텐데 중요한 임무가 되겠구먼.”

 

역시 그가 예상한대로 이튿날 성공회 교회당 부근 산책로에 나타난 것은 이관수의 누이 이금순이었다. 그녀는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도 현장 활동을 포기하지 않은 운동가였다. 그녀는 성공회 교회당 아랫길에서 서성대고 있던 이이철의 등 뒤에 나타나 자연스럽게 걸으면서 말을 걸었다.

 

 “개나리가 피었는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하네요. 우리 좀 걸읍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전가옥이 필요한데 월세도 좋고 전세도 좋아요.”

 

 “기한은 언제까집니까?”

 

 “빠를수록 좋아요. 김근식 동무와 논의해서 결정이 되면 이 동무가 직접 경성으로 와주세요. 중요한 분을 모셔 와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곧 돈암정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용건을 마치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헤어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럼 산책 좀 더 하시구요.”

 

목례를 하면서 이철이 돌아서자 등 뒤에서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장거리 여행은 참 잘 해내셨어요!”

 

 “아, 네……”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어두운 나무 숲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이철은 김근식과 의논했는데 안전가옥인 아지트와 일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이철은 쇠뿔고개 부근이었고 김근식의 동네는 배다리 사거리 지나 공장들이 늘어선 곳에 있었다. 일단 기관지 작업은 이철의 집을 쓰기로 하고 이층전체를 빌리기로 했다. 따라서 이이철은 박 선생의 레포 역에 전념하기 위해 나가던 철공장을 사직하기로 했다. 경성에서 모셔올 선생의 거처는 예전 밤나무골 율목정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율목정에는 인천항에서 돈깨나 벌었다는 상인들이 기와집 동네를 이루어 새말이라고도 불렀으니, 만국공원 일대에 일본 부촌이 있다면 조선인 부촌은 율목정인 셈이었다.

 

조선인 부자들은 대개가 정미업이나 양조업으로 돈을 번 자들이 많았다. 김근식은 정미공장에 나가는 조직원에게 사정을 알아보게 했고 동네 입구에 반찬가게를 열어 놓은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과수댁이 여학교에 다니는 딸과 함께 사는데 안쪽 별채에 두 칸의 방이 있다고 했다. 이전에 정미소의 전기 기술자가 그 집에서 일 년 이상을 하숙했다고 그랬다. 김근식은 조직원을 시켜서 사흘 안으로 그 별채의 하숙 계약을 하도록 했다. 준비가 갖춰진 다음에 이이철은 경성의 이관수에게 찾아갔다. 그날 밤 이철은 이관수의 집에서 묵었고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옛날 화요회와 상해파의 선배들을 다시 불러 모았습니다. 그분들은 일찍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변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박헌영 선생은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고 상해에서 망명 시기를 거치고 지옥 같은 감옥에서 구사일생한 분입니다. 그를 모신 것은 조직의 중앙을 세우기 위한 것이며 각 정파의 단결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바쳐 그를 옹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관지 편집을 위한 아지트를 마련하여 그를 안주시키려는 것이라고 이관수는 말했다. 이튿날 저녁에 이이철은 마포 종점까지 전차를 타고 갔다. 마포 부두는 강변의 축대를 모두 돌로 쌓았고 길에도 돌이 깔려있어서 조선 같지 않고 이국적이었다. 강변에는 크고 작은 화물선과 여객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금순이 전차에서 내리는 이철을 기다렸다가 그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확인하고 부두로 앞서서 내려갔다. 그러고는 부두에 묶인 여러 배 가운데 둥근 지붕을 씌운 당두리 짐배에 올라갔고 이철도 뒤를 따랐다. 지붕 안에 양복 차림의 그가 앉아 있었다. 사공은 두 사람이었고 그들은 노를 저어서 강의 한복판까지 나아간 다음 쌍돛을 올렸다. 썰물 시간을 맞춘 배가 바람을 타고 하류로 재빠르게 흘러갔다. 선생은 어둠 속의 강물을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금순은 그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철은 조금 떨어져서 반대편을 향하고 앉았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졸다가 깨다가 하면서 강변 멀리 지나가는 마을의 불빛들을 내다보았다. 이튿날 새벽녘에 대명포를 지나고 영종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밤바다에 나갔던 어선들이 귀항하고 있어서 연안은 제법 오가는 배들이 많았다. 이철은 두 사람을 우선 창영정 쇠뿔고개 비탈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이층에 올라가 방안에 들어섰을 때에야 박 선생은 이철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동무 수고가 많았소.”

 

뿔테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는 선생의 눈초리는 냉랭하고 무덤덤했다. 그들은 오전에 쉬고는 고갯마루에 줄지어 있는 식당 주점 가운데서 요기를 했고 율목정 반찬가게 집을 찾아 나섰다. 골목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모퉁이에 길 쪽으로 격자 유리창 문이 잇달린 가게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함석 쪽문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크고 작은 함지와 유기그릇들이 층층이 쌓였고 맛깔스런 반찬이 그득그득 담겼다. 몸뻬 바지에 행주치마를 두른 얌전한 중년 아낙이 어서 오시라고 반기는데 이철이 공손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이 댁 별채에 들기로 했는데요……”

 

 “아, 예 그렇잖아도 오늘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세 사람을 재빨리 둘러보았고 반색을 하면서 앞장을 섰다.

 

 “들어오세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뒷문을 여니 곧 안마당이었고 안에 펌프를 놓은 우물과 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장독대가 있고 마당 맞은편에 아마도 광이었던 곳에 방을 들인 듯한 작은 별채가 있었다. 아궁이와 비좁은 부엌 공간도 있고 툇마루가 달렸는데 방은 가운데에 미닫이가 달린 상하방이었다. 방은 새로 도배가 되어 산뜻하고 밝아 보였다. 옷을 거는 횟대가 창문 아래 달렸고 농이나 다락은 없이 개어놓은 이부자리에 흰 무명 포를 씌워 두었다. 박 선생은 무표정하게 방을 둘러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금순이 주인 아낙과 계산을 마무리했다. 박 선생은 전근으로 가족과 떨어져 인천에서 직장에 다니게 된 사무원이 되었고 이철은 선생의 부하 직원이 되었으며 금순은 그의 누이동생이 되었다. 몇 달치의 하숙비를 미리 받은 주인 아낙은 명랑하게 금순에게 말했다.

 

 “아유 그동안 별채가 비어서 썰렁하고 무서웠는데 이제 선생님이 오셔서 든든해지겠네요.”

 

박은 공장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그야말로 지식인 이론가로서 대중적인 붙임성이 있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원칙과 실천에 투철한 혁명가로서 그의 투쟁이력과 각종 문건의 정치적 저술들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합류에 의하여 경성 콤 그룹은 지도부의 권위와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뒤에 여러 평자들은 경성 콤 그룹이 일제 치하 경성지역 노동운동이 노선과 지역의 차이를 불문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인 결사체였다고 증언했다. 이 기간에 백여 명에 이르는 활동가들이 가입하거나 준회원으로 등록했다. 경성 당 재건파의 주도 아래 화요파의 박헌영을 위시하여 상해파 운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아직 변절하지 않고 활동하던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이 총망라 되었다. 이것은 권모의 국제선에 의하여 파벌주의로 척결되었던 경성 당 재건파의 승리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이금순은 김근식의 거처에 합류하여 아지트 부부가 되었고 기관지 편집에는 경성의 활동가들 가운데 집필 능력이 있는 남녀 활동가들이 합세했다. 전국의 조직에서 경성으로 모인 지방의 소식들이 어둡고 엄혹한 전시체제를 뚫고 기관지를 통하여 활동가들에게 알려지기 사작했다. 평양의 직공들이 동맹파업을 했다는 소식이며, 통제경제가 강화된 이후 파업, 태업, 등의 노동쟁의가 점차 증가하여 전국에서 매일 한두 건이 발생하였다는 총독부 경무국의 조사 내용도 알려졌다. 평양 동우 고무공장과 경기 고무공장의 여공들이 파업한 소식과 대구 영남 지역에서 징용을 회피한 장정들이 팔공산에 숨어들어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려졌다. 기관지는 철통같은 보안 아래 점 조직을 거쳐서 한정된 부수와 필사 또는 재등사하여 배포되는 방식이었으나 재생산 과정에서 총독부 당국에 포착되었다. 치안당국은 이전의 사상범 전과 기록에 오른 모든 사람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체포되지 않았거나 보호관찰 기간 중에 잠적한 자들은 따로 전담 형사조가 철저히 점검 추적하도록 했다. 그들은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미행하고 일상을 감시했다. 조직의 인민전선부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이나 비교적 느슨한 학생운동 등에 관여하고 있었고 일제는 이들 부류의 뒷조사를 통하여 이관수의 존재와 활동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고등계의 이관수 전담반은 그의 레포 노릇을 하던 중앙고보 학생을 미행하여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관수를 체포했다. 그는 인천에서 올라온 기관지 원본을 아지트에서 재등사하여 레포에게 전달하려던 참이었다. 외투 깃을 올리고 한 손에 신문을 둘둘 말아 쥔 이관수가 동숭동에서 마주 걸어오던 레포와 지나치며 신문을 전하고 유유히 혜화동 쪽으로 걸어갔다. 신문 속에는 기관지 등사본이 들어 있었고 형사대는 학생을 검거하는 한편 이관수를 향하여 달려갔다. 그때 이는 추적자가 뒤에 붙었음을 눈치 채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혜화동 로터리 앞에는 다른 형사조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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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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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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