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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69화 : 자진출두는 수치스럽고 괴로웠다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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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이가 박선옥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고 기다리던 이철과 선옥은 건넌방으로 들어가 의논했다. 그들은 나직하게 얘기를 나누었으므로 신금이는 내용을 듣지 못했고 일부러라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거였다. (2019.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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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보조가 말하기도 전에 야마시타가 소리를 꽥 질렀다.

 

 “뭔가 생계를 꾸려갈 일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생업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말이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공장에 다시 취업을……”

 

이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야마시타가 잘랐다.

 

 “그건 안 될 일이고. 니 이름 가지고는 공장에 다시는 취직할 수 없다.”

 

 “그럼 무엇을 해서 먹고 살까요?”

 

 “가두노동이건 행상이건 가게를 하건 그건 니가 알아서 해야지.”

 

 “가두노동을 하겠습니다.”

 

이철이 말하자 야마시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한쇠하구 의논해 봐라. 일단 노동이라고 써놓도록 하지.”

 

형사보조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서너 줄의 문장을 쓰고 나서 읽어주었고, 그것은 역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법을 준수하고 생업에 힘쓰며 근로 갱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아래 지장 찍어.”

 

이철은 인주를 꾹 누르고 자술서 아래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야마시타가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느이 아부지 형이 모두 총독부 산하 직원인데 여태 창씨개명하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거냐?”

 

이철은 묵묵히 서있었고 야마시타는 계속 윽박질렀다.

 

 “전쟁 시국이란 말이다. 아직은 권장사항이지만 앞으로 국가 시책이 될 것이다. 조선 사람은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어야 살 수 있는 거야. 그래야 일등국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아무튼 다음 달에도 자진출두 하도록.”

 

이철이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야마시타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한쇠에게 안부 전해라!”

 

보조가 그를 경찰서 정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원칙적으로 경성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금지다. 여행 갈 일이 생기면 와서 신고하고 허락을 받도록 해라. 허락 없이 이탈하면 재구속이다, 알겠나?”

 

이철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보이고 돌아섰다. 경찰서 자진출두는 등에서 진땀이 날 정도로 수치스럽고 괴로웠다. 그는 식구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형수가 끓여주는 보신탕과 수육을 수걱수걱 먹어댔다. 그야말로 석 달 열흘 동안에 이철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아왔고 원기를 회복했다고 느꼈다. 신금이는 추석을 쇠고 난 며칠 후 가을볕이 따스하게 내려앉은 마당에서 호박곶이며 시래기 무말랭이 등속의 겨울철 갈무리 먹거리들을 채반에 널고 있었다. 지산이는 마당에서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자동차 장난감을 끌고 다녔다. 건넌방에 틀어박혀 있던 시동생 이철이가 슬그머니 나오더니 마루에 앉았다.

 

 “형수, 나는 내일 집을 떠나려 합니다.”

 

 “예? 어디루 가시게요?”

 

 “어디든 영등포에서 벗어나야겠어요.”

 

금이는 시동생이 치안당국의 보호관찰자로서 벌써 세 번이나 자진출두를 했고 그때마다 괴로워하는 기색을 잘 알고 있었다.

 

 “형수는 잘 아시겠지만 나는 운동을 계속해야 할 사람입니다.”

 

 “누가 말리겠어요?”

 

금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공연히 웃음을 지었다. 씁쓸하고 안쓰럽고 그러한 대꾸였을 것이다.

 

 “박선옥 동무를 좀 불러 주세요.”

 

 “선옥이는 그때 곤욕을 치르고는 공장도 그만 두고 떡집 일만 하구 살아요.”

 

 “무슨 일에 끌어 들이려는 게 아니구요, 둘이서 인천에 청춘 랑데부 다녀올까 하구요.”

 

신금이는 청춘 랑데부가 무슨 말인지 곧 알아들었다. 연락 접선을 의미하는 활동가들의 속어였던 것이다. 그녀는 서슴지 않고 소리 내어 웃었다.

 

 “홀아비가 처녀를 꾀이려구요 깔깔깔. 그 애는 곧 시집간다는 모양이든데.”

 

 “장산이 엄마 소식은 알 길이 없을까요?”

 

형수가 분위기를 바꾸려 한다는 눈치도 채지 못하고 이철은 다시 무겁게 아내의 얘기를 꺼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형수에게서 고모와 그녀가 장산이를 받아내던 일이며, 지산이와 장산이가 홍역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생사가 엇갈린 것, 그리고 한여옥이 만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일철과 자기를 밖으로 불러내어 의논을 청했던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를 들었다. 신금이가 말했다.

 

 “항일연군에 들어갔겠지요.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거기서 활동을 했었다니까. 일정한 거처가 있다면 모를까, 총 메고 산야를 누비고 다니는 사람의 소식을 어찌 알겠어요.”

 

 “저도 뒤따라 만주로 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국내에서 조선의 당 재건이라는 당면 목표를 두고 모였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노력해야겠지요.”

 

신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해야 할 사람은 해야지요. 선옥이를 불러 올까요?”

 

 “형수님 부탁합니다. 저와 인천 가겠느냔 의사 타진은 박선옥 씨에게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버드나무집에서 선옥이 외조부모네 떡집까지 걸어서 십여 분이면 닿을 거리라 신금이는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일어섰다. 

 

 “핑하니 다녀올 테니 지산이 좀 봐주세요.”

 

신금이가 박선옥을 찾아가니 그녀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일하다가 두 손에 떡고물을 잔뜩 묻힌 채로 반기면서 뛰어나왔다.

 

 “이게 얼마만이우? 언니 만난 게 몇 년은 되는 것 같다아.”

 

 “멀, 지난여름에 시장에서 함께 냉국수 먹었구먼.”

 

금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소곤 말했다.

 

 “우리 시동생이 자넬 만나자네. 할 얘기가 있나 봐.”

 

 “나오셨단 얘길 듣고도 엄두가 안 나고 부르지 않으셔서 못 가 뵈었어요. 어찌, 건강은 회복하셨는지?”

 

 “응 많이 좋아졌어.”

 

신금이가 박선옥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고 기다리던 이철과 선옥은 건넌방으로 들어가 의논했다. 그들은 나직하게 얘기를 나누었으므로 신금이는 내용을 듣지 못했고 일부러라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거였다. 그저 짐작으로 인천의 누구인가를 만나려 한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튿날 열 시 쯤에 이백만이 공작창에 출근하고 일철은 아직 먼 고장에서 특급열차를 몰고 있을 무렵, 이철이 작은 트렁크를 들고 건넌방에서 나왔다. 그는 나서기 전에 형수에게 일렀다.

 

 “아부지나 형에겐 아무 말씀도 전하지 마세요. 제가 인천 간다는 건 형수만 알구 계셔야합니다. 어쩌면 안정된 후에 기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시기 전에 서방님에게 알려드릴 일이 있어요.”

 

신금이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그는 마루 끝에 앉았다.

 

 “모르셨지요? 지난 석 달 열흘 동안 어머님이 늘 머리맡을 지키고 계셨다구요.”

 

이철은 이전처럼 웃거나 농지거리를 하지 않고 다소곳하게 앉아서 형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떤 날은 장산이를 데려오기두 했지요.”

 

그 말에 이철이 울컥 하더니 고개를 떨어뜨렸고 굵은 눈물이 마루에 뚝뚝 떨어졌다. 신금이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죽고 사는 일이 그렇게 별다를 것이 없지요. 그러니 하고픈 일을 하세요.”  

 

이철은 총총히 버드나무집을 떠났고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그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말도 되지만, 이듬해 초에 이일철은 솔가하여 철도관사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삼 년을 그 집에서 살게 된다. 이진오는 할머니 신금이와 아버지 이지산을 통하여 철도관사의 옛 생활을 자세히 들었다.

 

반듯한 네모의 상자 같은 똑같은 집들이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는 큰 길을 앞에 두고 일곱 걸음쯤의 앞마당을 지나면 현관이었다. 집 뒤에는 서너 걸음 정도의 뒤뜰이 있고 또 그만큼의 거리에 뒷집의 뒤뜰이 있었다. 따라서 남향집은 운에 따라서 차지가 되었으며 운 나쁘게 서향이나 북향이 되는 집도 있었다. 미닫이로 열리는 격자 유리창 달린 현관문은 문짝 아래 작은 도르래가 있고 문턱에 철선이 있어서 조금만 힘주어 밀면 드르륵하면서 활짝 열렸다. 현관에서 마루 위로 올라서면 바로 옆에 변소가 있고 그 앞에는 문간방이 있으며 방 앞은 쪽마루가 이어진 부엌이었다. 마루 앞에 가족들이 모이는 거실로 들어가는 장지문이 있고 부엌 부뚜막 앞에도 작은 쪽문이 있어서 허리를 굽혀 밥상을 들여갈 만한 곳이 안방이었다. 마루 앞 장지문을 열면 다다미 여섯 장 정도를 깔아놓은 우리 식의 대청 비슷한 곳이 식구들이 모여서 밥도 먹고 하루 일을 서로 이야기 하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까 안방은 장지문 오른편 안쪽에 있다. 왼쪽에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 앞쪽으로는 격자의 창호지 문이 있고 쪽마루가 길게 이어졌으며 바깥쪽에도 유리 달린 문짝이 있었다. 여름에는 열어두고 겨울이면 꽁꽁 닫아 문풍지까지 단속해가며 지냈다. 겨울에도 날씨 좋은 날은 안쪽의 장지문을 열어두면 따스한 햇볕이 유리창으로 비쳐들어 다다미가 따뜻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운 좋게 남서향 집이었으니 절반은 좋았던 셈이다.

 

철도관사에는 일본인 직원들이 대다수가 거주했고 조선인은 이삼 할 정도 되었다. 관사는 소유주가 총독부 철도국이었으므로 임대하여 사는 터라 누구든 변형 개조할 수가 없었고 수리도 허가를 얻어 영선부의 기사가 나와서 시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다다미가 익숙하지 않고 조선 기후에도 맞지 않아서 안방만큼은 어떻게든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몰래 온돌방으로 개조했다. 일본 사람들 하는 대로 처음에는 유담뿌라는 함석 보온통에 뜨겁게 데운 물을 채워 요 속에 넣어 추위를 막았지만 새벽녘에는 영락없이 식어버려서 노인들이 고생을 했다. 다다미방에서 보통 때에 보온하는 것은 숯불화로가 고작이어서 자주 환기시키지 않으면 가스에 중독되기도 했다. 이백만이 작은 주물난로를 만들어 중방 거실에다 놓았고 석탄을 때면서 제법 아늑한 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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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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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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