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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면의 밤

당신과 함께 건너는 오늘, 불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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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을 마냥 안쓰러워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아주아주 많이 아껴주면 좋겠다. (2019.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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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면의 밤. 사라지는 것에 대해 곱씹는 밤. 사라지는 것이 가장 쉬운 일로 느껴진 날들이 있었다. 다른 무엇도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언젠가 수개월 수년 동안 나의 매일을 감쌌던 그 단단하고 긴 터널로 다시 들어가본다. 아니 이제는 밖에서 바라본다. 어둠이 어둠인 줄 모르게 잠깐이 잠깐인 줄 모르게 끝날 것 같지 않게 이어졌던 그 시간을 떠올린다. 지금은 어떤 감각으로만 남아있는 시간, 그 속에서 나는 함께여도 혼자였다. 가물가물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이었다. 그러다 한순간 꺼진다 해도 아무도 모를 흐릿한 빛이었다. 멈춰선 것만 같은 바람이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 말을 조용히 입에 담았을 때 느껴지는 딱 그 무게만큼 가벼웠다.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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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외로운 사람의 비밀 서재로 숨어 들어가 손때 묻은 책들을 하나하나 순례하는 밤. 너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현실을 간단히 건너 뛰었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기억을 따라가면 네 몸처럼 부르던 노래가 흐르고. 방의 빛은 오래된 기억을 비웃듯 바라볼 때마다 다른 색깔을 들이민다. 그러나. 모서리와 모서리를 흘러내리던 그날의 공기는. 낡은 외투처럼 내 몸을 감싸던 그 목소리는. 바닥 위로는 드문드문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얼룩은 눈물이었다가 한숨이었다가 한낮이었다가 한담이었다가. 목구멍은 막히고 마음은 밝히고. 겹으로 쌓여가는 배경을 이끌고 밤은 다시 몰려오고. 너는 어렴풋한 밤의 윤곽 위로 천천히 불을 놓아준다. 하루는 지나가고 문은 닫히고. 너무 많은 이름이 겹으로 떠올라 더 이상 너를 부르지 못하고.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66-67쪽, 「밤에 의한 불」

 

각자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남았다. 누군가는 붙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모습을 감췄고 누군가는 사라짐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보냈지만 보내지지 않았고 누군가는 보내지 않으려 해도 보내야만 할 테다.

 

보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그가 있다. 그의 말이 표정이 몸짓이 나에게 와서 무엇이 되었는지 어떻게 남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결코 알려주지 않을 테다. 알려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마 앞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거기에 서서 언제든 나를 만나러 올 준비를 하고 있을 거다. 내가 뜬눈으로 잔뜩 웅크린 채로 날이 밝아오기 만을 기다릴 무수히 많은 날에 그 스스로 사라질 수는 없으므로 그러지 못하여 대신 나에게 사라짐을 가르치려 할거다.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테다. 사라진다고 끝은 아니니.

 

그리고, 보내고 싶지 않으나 기어이 떠날 당신이 있다. 나에게만은 거절이 없었던 당신의 마음, 당신 안에서 끝내 나보다 단 한 뼘도 커지지 않을 그 자신의 존재를 가늠해본다. 당신이 견뎌야 했을 수많은 겨울 그 인내의 시간 또 꽃망울의 시절을 짐작해본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얼마나 무심한 사람이었는지를 아프게 되새긴다. 나를 다잡으며 다시 살피는 당신의 삶. 그것이 후회만의 삶은 아니기를 그 후회에 내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는 않기를, 혹여 잊을까 마른 손톱으로 꾹꾹 눌러 새기며 소망한다. 사라짐은 마침내 굳게 다물어진 입에서 느껴지는 딱 그만큼 묵직하다. 힘에 겹다.

 

결국 모두는 점점 나빠진다. 우리가 건너온 터널은 우리를 어둠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무거워진 사라짐은 그 무게 덕분에 실존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많은 것을 잃을 것이고 그 대가로 얻을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의문이다. 너는 남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결국 모두는 점점 나빠져왔고 나빠져 갈 것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덜 나빠질 수 있다. 잘 나빠질 수도 있다. 알지만 계속 걸어야 할 애쓰는 삶이다. 그러니 모든 삶은 지치고 서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 와중에 당연히 나는 내가 제일 서럽고 애처로운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마냥 안쓰러워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아주아주 많이 아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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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최은영, 『벌새』 213-214쪽, 「그때의 은희들에게」


아까운 그대를 그려본다. 감히 함부로 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래도 그대도 불이고 빛이고 바람이었음을 알고있다. 알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전하지 못할 말들을 하나하나 온 마음으로 다듬어 내는, 당신과 함께 건너는 오늘, 불면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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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형욱(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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