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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57화 : 목간은 추석 전날이 젤 좋겠네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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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며칠 후 안대길의 밥집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는 행상 차림이었는데 팔다 남은 밴댕이 멸치 등속을 담은 널판상자 두어 짝을 지게에 얹어 지고 들어섰다. (201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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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그는 방우창을 보는 순간 이대로 덮쳐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뛰는 가슴을 진정 시키느라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천천히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 그를 안내했던 보조에게 말했다.

 

 “저들 다섯 명 모두 어디서 뭘 하며 사는 자들인가 파악해야 한다. 이게 우리가 인천에서 공작하는 이유다. 특히 방우창은 내가 맡겠다.”

 

야마시타는 즉시 본서로 들어가 보고했고 경무국 고등계에서도 과장이 나와서 그의 보고를 재확인했다. 검거하지 말고 저들이 경성과 연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안대길이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그는 신길정에 있는 모친의 밥집으로 돌아갔다. 안대길은 치안사건으로 수감 되었다가 석방된 활동가의 수칙을 지켰다. 대부분의 활동가는 조직을 끌어가던 핵심이 아닌 경우에는 수사과정과 재판정에서 전향 선언을 할 수 있었다. 현장 노동자의 거의 모두가 정치적 책임을 검거된 핵심 활동가에게 미루고 자신은 무지해서 의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거나 앞으로 선량한 황국신민으로 살아가겠다는 각서를 제출했다. 석방 직전에도 그들은 형무소 당국에 이러한 행정절차의 서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그 대신에 조직의 핵심 활동가는 대중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하여 끝까지 자신의 사상을 밝히며 고수했고, 다만 자신의 혁명적 행동은 아직 준비 과정에 있었고 조직화 직전에 미수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안대길의 경우에도 파업 쟁의 과정에서 주동자 노릇을 했달 뿐 적색노조의 조직적 연계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구속기간의 형량을 받았고, 그는 석방되기 전에 서약서에 지장을 찍었던 것이다. 석방되면 과거 동지들과의 연락을 서두르면 안 된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옥중 고초를 겪으며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단조로운 일상을 계속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든 생계를 마련해야만 한다. 취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취업을 한다는 것은 그가 사회의 제도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시의 눈초리도 느슨해진다. 만약 조직에서 연락이 필요하면 레포를 파견할 것이다. 그때까지 모든 것을 잊고 기다려야 한다. 또한 급한 사안이 발생하여 자기 쪽에서 연락하려 한다면 반드시 믿을만한 레포를 통하여 알리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

 

안대길은 하루의 일과를 스스로 정하였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취사를 위하여 물을 긷고 시장으로 나아가 모친이 일러준 채소와 음식재료들을 구입하여 자전거에 여러 상자를 싣고 돌아왔다. 모친이 뒷마당에 걸어놓은 쇠솥에 쌀을 안치면 장작불을 때고 풍로에 숯불을 지핀다. 그리고는 하루 온 종일 어머니를 도와 손님들에게 밥과 반찬을 나르고 영접하고 문 앞에까지 배웅 하는 등 바쁘게 돌아쳤다. 저녁 밥 때가 지나서 한가해지면 그제야 목에 수건을 두르고 방하곶 쪽으로 걸어 나가 샛강에서 몸을 씻거나 산보를 하고 돌아왔다. 그의 일상은 완전히 판에 박힌 듯 돌아갔다. 불온분자의 동향 살피기는 대개 신입 순사보조들이 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안대길의 늘 똑 같은 행동거지를 시간별로 적어서 보고했는데 대개 한 달쯤 지나면 관찰자나 보고를 받는 담당 형사는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연락을 하려는 쪽에서는 그의 일상 가운데 어느 시간과 장소가 유리한지를 면밀하게 틈새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이이철은 안대길의 석방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신길정 밥집 먼발치서 그가 오락가락하는 행동도 확인했다. 그는 방직공장의 야체이카 오르그인 박선옥을 선택했다. 안대길은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가 누구의 연락을 전하려는 것인지 쉽게 알아챌 수도 있었다. 박선옥은 방직공장 직공이었지만 외조부모를 도와 출근 전에 장을 보러 나오는 때가 많았다. 이이철과 한여옥은 떡집을 차린 뒤로 번갈아 시장에 나왔으므로 새벽의 시장이야말로 영등포 거리와 골목에서 소점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에게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안대길은 장꾼으로 제법 북적이는 새벽에 자전거를 이끌고 시장 좌판을 따라 걷고 있었다. 박선옥이 그가 살피던 좌판 앞에 와서 그의 옆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대길은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반가운 미소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그때에 한여옥은 너른 장거리의 가녘에 있는 어물전에서 생선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두 사람의 주위를 살폈다. 역시 노련한 그녀의 눈에 안대길이 달고 다니는 꼬리가 보였다. 누가 순사보조 아니랄까봐 그는 헐렁한 양복 상의 아래 홀태바지에다 각반을 두르고 있었다. 아마 안대길 역시 자신의 꼬리를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에그 그렇게 기다리던 햇콩이 나왔네!”

 

박선옥이 반기면서 콩을 한줌 쥐어 바구니에 줄줄 흘려보았다. 안대길은 자연스럽게 옆에 서있는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게 좋은 물건이지요?”

 

 “그럼요, 밥에 넣어도 맛있고 떡고물도 맛있지요.”

 

그녀는 햇콩을 한 됫박 달라고 주문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추석이 낼 모레라는데 날씨는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아낙네는 귀신바우에 멱 감으러 갈려면 자시가 넘어야 되는데.”

 

안대길은 대번에 알아들었고 확인까지 했다.

 

 “목간은 추석 전날이 젤 좋겠네.”

 

콩을 산 박선옥이 좌판에서 멀어지고 안대길은 푸성귀와 감자 등속을 사서 자전거에 실었다. 아직 장터를 돌아다니는 안을 남기고 박선옥과 한여옥은 시장 입구에 나와서 나란히 걸어갔다.

 

 “추석 전날 열두 시에 귀신바우, 확인 되었어요.”

 

박선옥이 맡은 일을 가볍게 처리했고 한여옥은 돌아가 남편 이철에게 알려 주었다.

 

이이철은 류재익의 체포 탈출 소동이 있고 나서 그의 중앙에 대한 유일한 선이었던 이관수와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류의 미야케 교수 집에서의 은거와 재탈출이 벌어진 이후부터 이관수가 아지트를 옮기면서 연결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경성 인근 어딘가에 함께 잠복해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이철은 이럴 때일수록 조직 점검을 하면서 서로 흩어지거나 일탈하지 않도록 운동 역량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체포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영등포 조직의 기본세포로 함께 출발했던 안대길과 방우창은 그에게는 소중한 출발점이었다. 한여옥이 경성을 점검하러 갔다가 와서 경쟁적으로 출발했던 국제선의 권 아무개의 조직이 자신들이야말로 류재익의 후계로서 당을 재건할 유일한 조직이라며 현장 노동자들을 접촉하고 다닌다고 했다. 이이철은 그들이 또한 경성 당 재건파는 분파분자들이며 과거식의 사업은 척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판을 몇 번이나 전해 듣고 있었다. 이철은 이미 성장한 주의자로서 이를 불문에 부쳤다. 현장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 뜻이 옳으면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몇은 이것이 국제당을 자칭하는 자들의 조직 찬탈이라고 했지만 이이철은 개의치 않았다.

 

거의 차올라 귀퉁이가 조금 모자란 열나흘 달이 떠올라 중천을 빗겨 갈 즈음에 이철은 집을 나섰다. 집집마다 모처럼 일 년 만에 찾아온 한가위를 맞아 형편에 맞게 차례 상을 준비하노라고 골목마다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열두 시 무렵이 되자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모두들 내일 아침을 위하여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이날 이 무렵에는 일제의 개들도 제 식구를 위하여 일찍 퇴근해서는 곯아떨어져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방하곶 귀신바위 근처로 갔고 부근은 그가 어릴 적부터 숱하게 멱 감으러 오던 곳이라 어둠은커녕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더구나 열나흘 달밤이었다. 그곳은 일찍이 이철이 김형신의 레포 한여옥을 만났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샛강의 호수 같은 너른 웅덩이 끝에 귀신바위가 거뭇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길 아래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희부염한 사람의 형체가 보이고 가까워지면서 낯익은 안대길의 걸음걸이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안대길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철은 먼저 그가 알아보도록 길 가운데로 나섰다가 아무 말도 없이 먼저 웅덩이 쪽으로 걸어 내려갔고 안도 그의 뒤를 따랐다. 웅덩이의 기슭을 돌아 작은 시내를 건너면 억새와 잡목들이 우거진 숲이었다. 그들은 함께 억새 사이에 주저앉자마자 서로를 그러안았다.

 

 “고생 많았지요?”

 

 “머 나는 무식쟁이루 버티어서 첨에만 혼이 났지. 형무소 가서는 공장출역도 나가고 괜찮았네.”

 

하고는 그가 못내 궁금했던지 제일 먼저 이철에게 물었다.

 

 “그런데 방형은 어디루 간 거야, 먼저 나갔잖아?”

 

 “국제당 김 선생에게 연루되어 잠복 중입니다.”

 

 “저런, 좀 쉴 것이지. 어디야?”

 

이이철이 말했다.

 

 “인천입니다. 자리를 잘 잡았으니 염려 안 해두 돼요.”

 

이철은 그 동안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대하여 안대길에게 말해 주었다. 되도록 빨리 중앙과의 접선을 회복해야겠다고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재 접선의 신호며 중간 연락처 등에 대하여 입을 맞추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며칠 후 안대길의 밥집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는 행상 차림이었는데 팔다 남은 밴댕이 멸치 등속을 담은 널판상자 두어 짝을 지게에 얹어 지고 들어섰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지게를 마당에 받쳐 놓고 청에 앉았다.

 

 “아주머니 국밥 하나 말아 주구 탁배기 한 사발두 주시오.”

 

그는 서성거리는 안대길은 눈에 뵈지도 않는지 분주한 시간대가 지나 방문턱에 걸터앉아 쉬고 있던 그의 모친에게 호기 있게 말했다. 안대길이 눈치 빠르게 접근하여 수저를 놓아 준다 김치보시기를 내준다 하는데,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그들 모자 두 사람뿐임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는 인천서 온 사람이우.”

 

안대길은 그냥 그를 멀건이 쳐다본다.

 

 “그래서요……?”

 

사내는 씨익 웃더니 말했다.

 

 “밴댕이 좀 들여노시라구. 이거 인천 방씨 상회에서 온 좋은 물건이우.”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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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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