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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아웃] <벌새>가 여러 정의로 내려지는 게 좋아요 (G. 김보라 감독)

책읽아웃 - 김하나의 측면돌파 (105회) 『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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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영화다? 예스. 퀴어 영화다? 예스. 정치 영화다? 예스. 성장 영화다? 예스. 역사 영화다? 예스. (2019.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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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라, 새로운 언어 속에서 뿌리가 흔들리던 대학원 유학 시절, 나는 종종 중학교를 다시 다니는 꿈을 꿨다. 중학 시절에 봄, 여름, 가을이 없던 것이 아닌데도 꿈속의 계절은 언제나 찬 겨울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면, 중학교를 다시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도리스 레싱의 글처럼, 나는 내가 왜 이것을 기억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모든 기억들을 채집하고, 기록했다. 휴대폰 노트와 녹음기에, 일기장에, 메모장에, 적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영화 <벌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보라 감독의 책  『벌새』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김보라 감독 편>


오늘 모신 분은,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벌새>. 이 한 마디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를 비롯해서 수많은 여성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분입니다. 김보라 감독님 모셨습니다.

 

김하나 : 감독님, 오늘도 큰 일이 있지 않습니까?


김보라 : 네, 오늘 10만 관객 돌파 기념 파티가 아트나인 테라스에서 열립니다. 

 

김하나 : 제가 약간 우려하고 있는 것은, 방송이 나가기 전에 또 기록이 갈아치워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조금 겁이 나기도 하네요. 10만 관객을 돌파했는데, 원래 예상했던 관객 수가 있나요? 


김보라 : 저희는 5만 정도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최근에 흥행했던 영화들을 보면 5만 관객이 들면 되게 잘 된 편이어서 저도 그 정도로 생각을 했었는데 더 잘 돼서 굉장히 감사한 날들입니다.


김하나 : 많은 분들이 <벌새>라는 영화에 대해서 고마움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응원을 하고 싶고 힘을 보태고 싶은 자발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것도 많이 느끼시지 않나요?


김보라 :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시고 관객 분들과 <벌새>와 관련된 많은 분들이 1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을 정말 기뻐하시고, 관객 수뿐만 아니라 굉장히 열광적인 사랑을 보여주시잖아요. 그런 것에 굉장히 신기해하고 같이 감사한 날들인 것 같습니다.

 

김하나 : 오늘은 영화보다는  『벌새』  시나리오집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일단, 저는 머리말을 읽고 생각이 이미 너무 많아졌어요. 머리말에 보면 ‘직면’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저희 팟캐스트에 장혜영 감독님이 나오셨을 때 ‘직면’이라는 말이 키워드였어요. ‘직면’은 ‘대면’보다 조금 더 호흡을 가다듬고 주먹을 꼭 쥐고 임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잖아요. 이 ‘직면’의 상대가 가족이었죠?

 

김보라 : 네.


김하나 : 처음에 시나리오를 쓰시다가 내 내면에 아직 그 아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 그것을 직면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것을 가족들과 내가 직면하지 않으면 풀어나가지 못하겠다’고 느끼셨던 때의 이야기를 조금 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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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 사실 저는 20대 때부터 직면을 시작했고요. 20대 때는 집에서 약간 호로자식이었어요(웃음). ‘쟤는 미친 거 아닐까?’ 거의 그런 취급을 받은 거죠. 맨날 화를 내고 ‘우리 집은 완전 가부장적이었어’, ‘아빠의 가부장성을 반성해’ 이런 정도로 이야기를 했었어요. 20대 때 이미 뒤흔들고, 도마 위에 모든 걸 올리고, 파헤치는 작업을 했었고 그런 작업 후에 만든 게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가족 관계가 한층 좋아졌고요. 그런데 가족 관계라는 게, 화해가 한 번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워낙 묵은 게 많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서 수년에 걸친 작업인 것 같아요. 실제로 많은 것들을 작업했지만 <벌새>를 하면서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보였고,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위해서 캐릭터 스터디의 관점에서라도 더 많은 것들을 드러내고 직면하고 화해하고 저 역시도 용서를 구하고 또 다시 뒤흔드는 작업들이 있었어요. 그때 가족들이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정말 많은 협조를 해줬죠.

 

김하나 : 그러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서 잘 키워놨다고 생각했던 자식이 20대가 돼서 호로자식처럼 변하더니(웃음), 잘못했던 것에 대해서 묻고 따지기 시작하고 도마 위에 가족들을 올려놓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도 이해가 되죠.


김보라 : 제가 말했던 방식이 항상 옳았던 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저 역시도 많이 상처 준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정말 반성하고 참회하는 기간도 있었어요. 내가 상처 받았다는 마음 하나만 붙들고 저 또한 가족들에게 상처를 줬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정말 미안했고 그것들을 용서구하는 작업들도 있었고요. 그런 많은 작업 끝에 <리코더 시험>과 <벌새>가 탄생해서, 가족들이 너무 이걸 기뻐해주는 게 정말 고맙고요. ‘나라면 이렇게 온전히 받아들이고 응원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을 때 되게 어려운 일인 것 같거든요.


김하나 : 가족들이 기뻐한 것은 영화라는 결과물에 대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 캐묻는 작업 이후의 변화에 대한 것인가요?


김보라 : 둘 다예요. <벌새> 개봉 전에는 주말마다 부모님 댁에 갔는데, 저한테는 그게 되게 기쁜 일이었어요. 가족에 대한 작업을 하기 전에는 거실에 나가는 게 싫을 때도 되게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TV를 안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어렸을 때부터 TV를 보려면 거실에 나가야 되는데 거실에 나가는 게 싫어서 TV를 안 보게 됐고, 그래서 지금도 TV를 잘 못 봐요. 버릇이 안 돼서. 그런데 가족 작업이 끝나고 나서는, 지금은 부모님은 거실에서 TV를 보시고 저는 옆에서 딴 짓을 해요. 그래도 옆에 있고 싶으니까 거실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있는데, 그 순간이 되게 좋고요. 가족들 다 우리가 이렇게 해냈다는 걸 되게 뿌듯해하는 마음이 있어요.


김하나 :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이것은 감독님만의 작업이 아니라 감독님과 가족 간의 공동 작업이었던 거죠. 우리가 해낸 거죠.


김보라 : 그렇죠, 공동 작업이었죠. 가족들 모두에게 정말 감사하고, 이건 다 같이 한 작업이라 저에게는 삶에서 가장 값진 일이었고요. 이 작업들을 하면서 뭔가 내 안에 뿌리가 잡힌 마음이었어요.


김하나 : 머리말에 이런 표현도 있죠. “그들이 나를 온전히 사랑해 주고, 집에 왔다는 느낌을 비로소 주었기에.” 영화에서도 ‘집’이 아주 중요한 공간이고 키워드이기도 한데, 감독님의 어린 시절에는 ‘집’이 나에게 ‘집’이 아니었군요.


김보라 : 네. 말씀드린 것처럼 거실에 나가기 싫었기 때문에 TV도 안 보게 됐고. 그런데 궁극적으로 TV를 안 봐서 <벌새>가 나온 것 아닌가 싶어요.


김하나 : 무슨 말씀이시죠(웃음)?


김보라 : TV에서 묘사하는 이성애 여성의 연애 같은 것들, 이성애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에 익숙해졌으면 <벌새>의 ‘은희’도 없었을 것 같아요. 그 안의 무수히 많은 매력적인 여성들도 굉장히 납작하게 묘사됐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TV를 안 본 게 전화위복이 됐다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김하나 :  『벌새』  시나리오집은 아주 좋은 읽을 거리였고, 영화 자체를 다각도로 바라보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이 아주 풍성해졌는데요. 제가 조금 의아했던 부분이 있어요.


김보라 : 어떤 건가요?


김하나 : 일단 이 질문을 드려볼게요. 누군가가 ‘<벌새>는 퀴어 영화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실 것 같으세요?


김보라 : 퀴어한 영화입니다, 라고 할 것 같아요. <벌새>가 여러 정의로 내려지는 게 저는 되게 좋아요. 페미니즘 영화다? 예스. 퀴어 영화다? 예스. 정치 영화다? 예스. 성장 영화다? 예스. 역사 영화다? 예스. (웃음)


김하나 : 시나리오집을 보면서, 영화에서는 삭제된 장면이 있으니까, ‘이 디테일은 이렇게 바뀌었구나, 그래서 뉘앙스가 조금 다르구나’ 하고 느꼈던 부분들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은희’의 X동생인 ‘배유리’가 짧은 머리였다가 머리를 기르면서 똑딱핀을 꽂고 남자애랑 같이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다는 건데요. 영화에서는 안 나오는 장면이지만 시나리오집에는 은희가 유리한테 ‘너 나 좋다고 했으면서, 그런데 왜 남자 사귀어?’라고 묻는 장면이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시나리오 상에는 퀴어적인 뉘앙스가 조금 더 강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김보라 : 맞아요. 지금  『벌새』  에 실린 건 완고인데, 그 이전 버전에는 유리랑 은희가 키스씬이 있었어요, 뽀뽀가 아니라.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어서 완고에서는 뽀뽀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런 맥락이 조금 사라진 게 있는데... 여기까지만 말할게요(웃음).

 

김하나 : 의도하지 않았는데 ‘은희’와 ‘영지’ 역의 두 배우가 왼손잡이였다는 것도 신기했어요.


김보라 : 네, 그런 것도 정말 영화적인 좋은 우연 같아요.


김하나 : 『벌새』  에 실린 앨리슨 벡델과의 대담에서도 ‘synchronicity’를 이야기하면서 기이한 우연 같은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영화에도 기이한 우연이 있었던 거군요. 


김보라 : 네, 맞아요.


김하나 : 그 사실을 아셨을 때 너무 신기하고 반가우셨겠어요.


김보라 : 정말 신기했어요. 저는 개조된 양손잡이거든요. 원래 왼손잡이인데 그 시대에는 오른손을 써야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밥 먹고 글씨 쓰는 건 오른손으로 하는데, 다른 건 다 왼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 스스로는 왼손잡이로 정체화하는 게 있죠. 원래는 왼손잡이였으니까. 그런데 지후(은희 역의 배우 박지후)가 왼손잡이이고 새벽(영지 역의 김새벽) 씨가 왼손잡이이니까, 작은 한문 학원 교실 안에 세 명의 왼손을 쓰는 여자들이 있는 거죠. 저도 현장에서 그게 되게 신기하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기분 좋은 우연이고. 또 두 사람이 왼손을 쓰는 그 우연 덕분에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시각적으로도 공고해지는 거예요.


김하나 : 그렇죠. 저는 당연히 오른손잡이인 배우들에게 ‘여기에서는 왼손잡이인 설정이야’라고 하신 줄 알았어요.


김보라 : 그래서 정말 농담하고 싶어요(웃음). 제가 두 분을 몇 달 동안 특훈을 시킨 걸로(웃음). 

 

김하나 :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사 중에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배유리의 대사가 ‘이전에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제 그것은 없는 것처럼 나아가는’ 것처럼 들렸어요.


김보라 : 우정이었으면 그렇게 헤어질 필요도 없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은 우정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명확하게 했고요. 그래서 <벌새>가 퀴어한지에 대해서 물어보실 때, 그냥 영화 자체가 퀴어한 것 같아요. ‘은희’도 퀴어하고 ‘영지’도 퀴어하고. 거기에 나오는 여자들이 정상성의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지 않잖아요. 엄마 같은 경우도 공무원처럼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저는 그런 정상성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그리는 것에 주력했었고, 그 맥락 안에서 이 영화의 퀴어함을 바라봐주시는 게 되게 좋아요.

 

 

*오디오클립 바로듣기 //audioclip.naver.com/channels/391/clips/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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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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