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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54화 : 바랜 꽃도 있고, 피는 꽃도 있네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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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전역에 경찰의 비상망이 펼쳐져 집 밖으로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날 낮에 관할 동대문경찰서에서 춘계 청결심사를 4월 15일에 실시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때 일제 강점기의 운동사 가운데 가장 놀랄만하고 기이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2019.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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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벚꽃 동산에 피어 있는 꽃, 바랜 꽃도 있고, 피는 꽃도 있네.’ 모리다는 일본 노래의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던 조선인 정치범들은 잘 지었다고 칭찬해 주었고 모리다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쓸쓸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일로 엄한 추궁을 받은 모리다 순사는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도의 산골 오지 주재소로 좌천되었다.

 

서대문 경찰서 부근의 자동차 회사에서 택시를 잡아 탄 류는 황금정 2정목에서 내려 3정목까지 걸어가서 다시 차를 잡아타고 동소문까지 가서는 또 하차하여 낙산자락을 넘어 동숭동으로 갔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일단 추적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신분이 뚜렷하고 일제 경찰이 전혀 의심하지 않을 사람의 집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재익이 쁘띠 인텔리 계급의 관념적인 선배들의 운동방식을 극복하여 당 재건을 아래로부터 설립해 나가자는 실천을 해온 이후 조직 성원들은 거의가 노동자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가 노동 현장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학생운동권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만큼 급박한 생존 조건에 몰려있지는 않았으나 순수하고 선진적인 사회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으며, 투쟁에 나섰다가 검거되거나 억압을 당하여도 스스로 극복하고 운동 현장에 되돌아오는 자가 많았다. 학생운동은 특히 광주 항일학생운동이 전국화 된 이래로 수년째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진행 성장해 오고 있었다.

 

처음에 중앙조직을 결성할 때부터 학생운동 분야의 책임이 정 모에게 맡겨졌다. 정은 경성제대를 나와 출세의 길을 걷지 않고 활동가가 되었다. 경성제대의 교수 미야께는 동경제대를 거쳐 독일에 유학하여 독일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경성제대에 부임하여 경제학과 마르크시즘을 가르쳤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조선인 학생들이 여럿이었다. 학생운동 분야를 담당했던 정이 류재익에게 미야께를 소개했고 이들은 조선 정세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몇 차례 토론을 했고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다. 류는 경찰의 숨 가쁜 추격을 피하여 경성제대 미야께 교수의 관사에 찾아가면 얼마동안의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류재익은 동숭동에 이르러 어둠 속에서 미야께 교수의 집 담장을 넘어 정원에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훤히 밝자 그는 흙 묻은 옷을 털고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는 현관의 벨을 눌렀다. 하녀가 나오자 자기는 김 아무개라는 학생이고 교수님의 제자인데 만나 뵈러 왔다고 말했다. 미야께는 하녀에게서 김이라는 학생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현관으로 나가보았다.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외투를 걸친 류재익의 새벽 방문에 그는 사태를 짐작하고 얼른 거실로 안내했다. 류는 방금 전 새벽에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하여 오는 길인데 당분간 은신할 수 있겠는가를 미야께 교수에게 물었다. 미야께도 그의 일차 탈출 소동이 이미 달포 전에 신문에 났었기 때문에 그의 두 번째 탈출에 더욱 놀랐다. 마침 그날 정 아무개도 미야께 교수를 방문하러 왔다. 류는 정에게 적합한 은신처를 물색해 달라고 했으며 잠행에 필요한 의복이나 신발 등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무렵에 미야께의 아내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어머니가 일본에서 방문차 와있었고 하녀가 있었다. 보안을 위하여 해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류의 의견에 따라 하녀는 그날로 해고 되었다.

 

운 좋게도 류가 찾아갔을 때 미야께 교수의 아내와 어머니는 병원에 있었다. 거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류가 미야께에게 어디엔가 당분간 숨어 지낼 방 하나를 빌려 달라고 했지만, 경성 전역에 경찰의 비상망이 펼쳐져 집 밖으로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날 낮에 관할 동대문경찰서에서 춘계 청결심사를 4월 15일에 실시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때 일제 강점기의 운동사 가운데 가장 놀랄만하고 기이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미야케 교수가 침착하게 자기 의견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 마루 밑에 숨어 지내는 것이 어떻겠어요?”

 

류재익과 미야께는 함께 다다미를 들어내고 마루 판자를 뜯었다. 바닥에 맨 땅이 드러났는데 살펴보니 모래가 많이 섞인 부드러운 흙이어서 쉽게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재익은 삽으로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일대가 천변이어서 모래흙이었지만 돌이 많아서 땅 파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아침 열한 시 경에서 밤 열 시 무렵까지 류재익은 땅을 팠다. 파낸 흙과 돌은 교수가 양동이에 담아내어 정원에 쌓았다. 사람이 누워 지낼만한 구덩이와 통로가 마련되었고 남쪽 창문 아래로는 공기구멍을 내고 음식을 넣어 주기로 했다. 흙바닥에는 신문지를 두툼하게 깔고 침구와 옷가지 등속을 넣어 두었다. 음식으로는 제 때에 먹을 빵, 달걀, 만두에서 귤 사과 같은 과일과 통조림을 비상식량으로 장만해 두었다. 대소변은 구멍을 파서 볼일을 보고 흙을 덮곤 했다.

 

4월 20일에 미야께의 아내가 퇴원하여 모친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모친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걱정은 미야께가 4월 22일부터 만주의 간도 방면 시찰을 위한 출장을 갔다가 열흘쯤 뒤인 5월 2일경에나 돌아오게 되었다. 이는 바깥에서 정세를 살펴온 정 모의 연락에 의하여 류가 미야께에게 권유한 출장이었다. 주인이 출장을 간 것이 확실한 이 집이 경찰의 주목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하고 류재익은 생각했던 것이다.

 

 “번거롭지 않도록 음식을 한꺼번에 마루 밑에 장만해 주시면 됩니다.”

 

 류가 그렇게 부탁했지만 미야께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내에게 사실을 밝히고 부탁해 놓겠어요.”

 

 “아, 부인에게 말씀 하신다구요?”

 

 “아내는 학생 때부터 독일 유학 때까지 저의 충실한 동지였습니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미야께는 아내인 히데를 거실로 불러냈고 수염이 덥수룩한 류재익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조선의 혁명가이며 공산주의 운동의 동지요. 나는 이 사람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믿어준다면 우리를 도와주세요.”

 

히데는 눈물이 글썽해지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당신의 뜻대로 류 선생님을 보호하겠습니다.”

 

히데는 독일 유학 시절에 베를린에서 열린 반제동맹 대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독일 사회주의 그룹들과도 교류하여 그곳의 분위기에 익숙했기 때문에 사상적 활동가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이 출장을 떠난 열흘 동안 그녀는 마루 아래 토굴 속의 류재익에게 음식을 넣어 주는 등 남편과 약속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나중에 정과 미야께가 검거되는 5월 21일까지 38일 동안 류재익은 이 토굴 안에서 은신했다. 그가 조선은 물론 일본에까지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경성제대 교수였던 미야께와의 동지적 우정과 그 집의 마루 밑에 토굴을 파고 은신했던 일화가 세상에 알려지고부터였다. 이 동안에 류는 거실 탁자의 나무다리 옆으로 젓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파고 종이쪽지를 주고받으며 미야께와 통신 연락을 하였다. 류재익은 미야께가 넣어준 책을 회중전등으로 비추며 읽기도 하고 때로는 한밤중에 굴에서 나와 목욕통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과 노동자들의 검거로 중단되었던 조선 반제운동의 일반적 방침에 관한 협의를 미야께와 함께 진행하였다. 연쇄파업의 엄혹한 상황 이래로 결정하지 못했던 조선 운동의 방침서 초안 중에서 과거 운동의 비판 및 금후의 운동방침 등을 검토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프로핀테른 극동부의 지도를 받았다는 원산을 비롯한 함경도 지방의 ‘태평양노조 계열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었는가?’ 또는 ‘조선 운동의 일반적 방침은 무엇인가?’ 등에 관하여 두 사람은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앞서 정 모를 통하여 류재익과 접촉했던 미야께는 역시 정의 주선으로 국제선이라 자칭하던 박형신 계열의 ‘경성 공산주의자’ 그룹과도 운동 방침을 협의하면서 이들 두 조직을 연결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는 류의 토굴 시기에 미야께는 국제선 그룹의 비합법 출판물인 ‘코민테른 제13차 총회 테제’ 및 기관지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격문’ 등의 내용을 그와 함께 검토 비판하기도 하였다.

 

5월 17일에 그들과 선을 대던 정 모가 검거되면서 나흘만인 21일에 미야께 교수도 검거된다. 경찰에서 미야께는 취조를 하루만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자신이 정신을 수습하여 스스로 자백서를 쓰겠다고 하였다. 다음날인 22일 저녁에야 미야께는 비로소 서대문서에서 탈출한 류재익이 자신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물론 이는 류재익에게 도망 갈 시간을 벌어 주겠다는 운동가들끼리의 원칙을 지키려던 미야께의 지연 전술이었다. 류재익은 이미 정 아무개가 검거된 날 이후부터 언제라도 도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정 모가 인텔리이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며 자신 이외의 일도 자백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은 나흘을 버티어 준 셈이었다.

 

류는 정이 체포되기 전에 그로부터 학생운동 조직이 마련해준 양복과 구두를 입고 있었고 미야께는 류에게 회중시계와 비상금 36원을 마련해 주었다. 미야께의 아내 히데가 남편이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류는 그 집을 빠져나와 낙산을 넘어 종로 6정목 방면으로 도주했다. 미야께의 자백으로 형사대가 그의 집을 덮쳤을 때 은신처로 사용하던 마루 밑 토굴에는 류재익이 먹고 남긴 밀감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고 한다. 이후 미야께는 치안유지법 및 범인 은익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다. 옥중에서 그는 ‘감상록’이라는 성명을 내고 전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있고 그 문헌도 심히 다수이며 더욱이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한번 이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면 단순히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이 요구되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할 만큼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 처음에는 단순히 이해하기 위해서만 읽기 시작한 것이 마침내 그것이 난해한 까닭에 여기에 어떠한 신비한 것을 인정하게 되고 따라서 이를 비판하지 않고 단순히 받아들여서 다만 감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가 실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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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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