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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d experience : 대체로 아픈 경험들

<월간 채널예스>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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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 몸이 겪은 진실이다. 왜 겪어 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부정부터 하나? (2019.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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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간된 이제오마 울루오의  『인종 토크』  를 번역할 때 수없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키보드 위의 손을 느려지게 한 표현이 라이브드 익스피리언스(lived experience)였다. 백인이 흑인에게 ‘인종 차별은 없다, 그건 피해망상이나 확대 해석이다’라고 주장할 때마다 저자는 “우리가 직접 겪은 경험을 무시하지 말라”고 반박하면서 반드시 lived experience를 사용했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흑백을 분리한 짐 크로법이 존재했던 나라에서 유색인의 몸으로 살아 보지 않고서 이들의 삶을 재단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 썼는지는 직감적으로 알 것 같았으나 번역이 골칫거리였다. 그냥 경험이라는 단어 안에도 ‘살면서 한(lived)’이란 뜻이 포함되지 않았나. 동어 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생생한 경험, 산 경험, 직접 겪은 체험이라고 직역하긴 했지만 저자가 울분을 느끼며 강조하고자 했던 의미가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었다.

lived experience는 원래 현상학과 질적 연구의 한 방법으로 한 개인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분석할 때 사용되었다. 『옥스퍼드 사전』은 집단의 경험이 아닌, 듣거나 본 이야기가 아닌 개인이 생활 속에서 직접 부대끼면서 쌓은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최근에 미국의 출판계나 언론에서 이 표현이 더욱 부상하게 된 건 소수 집단이나 억압받는 계층의 서사에서 자주 쓰이면서다. 개인의 고백이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시대이기도 하고 여성, 유색인, 장애인 등 소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산 경험이 아니라 남들은 모르는 아픔, 소외, 서러움, 억울함의 경험이라는 어감이 강하다.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의 저자를 비롯해 임신한 여성들이 그동안 받았던 오해와 서러움을 쏟아 내고 있다. 그래도 또다시 유세나 엄살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을 때 “임신해 봤어?”라고 따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건 내 몸이 겪은 진실이다. 왜 겪어 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부정부터 하나? 그런 면에서 각자의 몸에 대한 내밀한 진실을 담은 팟캐스트 <말하는 몸, 내가 쓰는 헝거>에도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생생히 살아 있는, 대체로 아픈 경험들이 가득하다. 


“고통이 타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해서, 내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내가 가진 고통, 상처가 타인에게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고통이라는 게 사실 전해지지 않는 거거든요.” 한국베트남평화재단의 구수정 이사의 말을 들으며  『인종 토크』  의 이제오마 울루오가 백인들 앞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이 표현을 곱씹을 때마다 떠오르는 저자와 책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근래 출간된 할머니들의 책이다. 이옥남 할머니의  『아흔 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과 순천 할머니들의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의 짧고 진솔하고 순박하고 유머러스한 글을 읽다 눈시울이 빨개져 책장을 넘기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글을 모르는 농촌 여성으로 시대의 굴곡과 가난과 차별을 헤쳐 온 칠팔십 평생의 삶을 그저 한 사람의 경험이나 인생이라고 하면 죄송하고 부족하지 않은가. 살아온 인생 혹은 생애 경험이라고 동어 반복이라도 한 단어를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때마침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오은의 옹기종기>에서 구술 생애사 작가인 최현숙 작가 편을 듣고 바로 검색한  『할매의 탄생』  소개글에서는 이 영어 어구가 정확히 번역된 한국어 문장을 찾아낸 것만 같았다.


“내 살은 거를 우예 다 말로 합니꺼?”

 

나는 다시 번역으로 돌아와 내 번역의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이 어구가 나올 때 사용할 유용한 한국어 단어를 얻기 위해 위 책들의 보도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편집자들이 어마어마한 공을 들이는 보도 자료는 정확하고 압축적인 한국어 문장의 창고라 할 수 있다.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에서는 ‘실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흑인의 경험이 아니라 흑인의 현실이나 실상이라는 단어를 썼어도 괜찮았겠다 싶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들으면서 ‘몸으로 쓴 기록’은 어떨까 생각했다. 경험이란 단어에 갇히지 말고 기록이나 역사라는 단어도 고려하기로 한다. 할머니들의 책을 소개한 글에서도 소중한 한국어 표현들을 발견했다. ‘한 사람의 지극한 이야기’ ‘만만치 않은 인생’도 멋지다. 가장 최근에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 어느 여성 생계부양자의 이야기』  를 읽고 먹먹해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저자 김은화는 최현숙 구술 생애사 작가의 강좌를 듣고 엄마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강좌 제목이 <소문자 ‘삶’들이 말하기 시작했다>였다. 소문자 삶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근사하다. ‘불완전한 자서전’도 기억해 놓는다.


lived experience에서 멀리 온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원서에서 이 단어를 또 만난다 해도 내가 모은 표현들을 활용하게 될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래도 일단 적어 두기로 한다. 내 언어 창고에 곡식 한 가마니 더 쌓아 둔 것처럼 든든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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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지양(번역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나쁜 페미니스트》, 《위험한 공주들》, 《마음에게 말 걸기》, 《스틸 미싱》, 《베를린을 그리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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