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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dane : 단조로운 일상이요? 그거 나쁜 거 아니에요

<월간 채널예스>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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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 나는 이 변변찮고 단조롭고 심드렁한 일상이 그리워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2019.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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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거실에서 고전 시트콤 <프렌즈>를 또 시청하고 있다. 정확히 몇 번째 정주행인지는 모르나 몇몇 장면과 대사는 거의 외울 정도라는 건 알고 있다. 명작이라도 두 번 보기 싫어하고 늘 신작을 찾아 헤매는 나는 그에게 <모던 패밀리> <빅뱅 이론> 등 2010년 이후의 인기 미드를 강력 추천해보았지만 남편은 몇 편 시도하다 주말 저녁이면 또 다시 <프렌즈>로 돌아간다. 어쩔 수 없이 오며가며 익숙한 대사를 듣고 때로 앉아서 같이 보면서 나는 방탄소년단의 랩 몬스터가 <프렌즈> DVD로 공부하여 원어민 못지않은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떠올린다.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영어공부를 하는 랩몬스터다. <프렌즈>만 100번 보면 RM처럼 유창한 영어 고수로 거듭날 수 있다. <프렌즈>는 최고고 나는 RM이다…….


우리 집의 지극히 평범한 토요일은 이렇듯 새로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미 200번쯤 반복되어 몇 년 전과 구별할 수가 없는, 때론 한숨 나올 만큼 지루하며 따분한 풍경이고 이때 나는 일상을 묘사할 때 종종 등장하는 단어 “mundane”을 떠올린다. 영한사전에는 “평범한”이라고만 나와 있지만 ordinary처럼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인 뉘앙스가 추가되어야 한다. 영영 사전엔 banal(따분한), tedious(싫증 난) 등이 동의어로 나오고 원래 라틴어 원뜻은 ‘world’ 였다고 하니 일상생활, 루틴과 관련된다.


“그녀는 퇴근 후 텅텅 빈 냉장고를 채우고 고지서를 정리하는 등 따분한 일들을 처리했다.” 같은 문장을 떠올리면 되겠다.


영한사전의 한국어 뜻이 빈곤하면 번역가는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mundane를 ‘지리멸렬한’(일상)으로 옮기기도 하는데 지리멸렬함은 다소 과할 수 있으니 적당한 대안을 몇 개 마련해둔다. 진부한, 건조한, 무료한, 따분한, 시시한, 단조로운 등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심드렁한, 도 좋겠다.


때로는 이 단어를 보면 ‘mediocre’가 연상되기도 한다. 주로 사람에게 사용되는 mediocre는 사전 상으로는 ‘평범한’ 이지만 약간은 열등하다는 뉘앙스를 담아야 하기에 “변변찮은, 신통치 않은, 하찮은” 등 썩 기분 좋지는 않은 단어를 끌어모은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나는 이 변변찮고 단조롭고 심드렁한 일상이 그리워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남편은 새 부서로 옮기고부터 거의 매일 야근하며 살이 쪽쪽 빠졌고 얼굴에선 그늘이 사라지지 않았다. 과도한 업무에 우울증과 건강 악화와 중년의 위기까지 겹쳐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병원에 다녀오면 주말 오후 몇 시간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먹고 싶다는 음식도 없었고, 즐겨 하는 산책도 하지 못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에 나는 ‘건강이 우선이니 쉬어도 괜찮다’와 ‘그래도 신중하자’ 사이를 오가며 대체로 침묵만 깔리는 심각한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마침 중2병보다 중3병이 무섭다는 걸 보여주기 시작한 아이는 사사건건 내 신경을 거슬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 하나에 폭발하여 소리를 질렀고 아이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주말이면 집안 공기는 한없이 무거웠고 나는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그런 주말을 보내고 나면 나도 오전 내내 소파에 너부러져 있다가 한차례 우울감에 시달렸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밀어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고 격한 운동을 하고 와서야 밀린 설거지를 하고 이불을 빨 수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했다. 제발 주말이면 남편과 뒷산에 다녀와 소박한 요리에 와인을 마시고 지긋지긋한 <프렌즈>를 보고 아이와 말장난을 하는, 15차 재방송 같은 평범한 주말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인간은 어찌나 간사한지 이번에도 잃어본 후에야 무엇을 갖고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고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남편은 서서히 산책을 하고 맥주를 사오고 <프렌즈>를 보기 시작했으며 아이는 식탁에서 반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짧게 살지는 않았기에 지금 이 상황도 평범한 일상에 속하다는 것을 잘 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생겼다거나 양가 부모님의 건강에 관한 전화를 받기라도 한다면 남편이 출근을 괴로워하고 아이가 반항하던 그 시기가 참으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상실의 감정들을 기록한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에서 한 남편은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 제인과 내게 ‘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 중에서 최고의 해는 언제였나요?’ 하고 물었다면 우리의 대답은 똑같이, 가장 기억이 안 나는 한 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같은 책에서  『나니아 연대기』  의 작가 CS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 조이를 잃고 나서 가장 그리웠던 건 ‘가슴이 미어지도록 평범한 일들’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번역하는 책에서 “mundane” 이란 단어가 나오면 또 다시 따분한, 시시한, 단조로운 일상이라고 옮기겠지만 있지도 않은 괄호를 넣고 한 마디 끼어들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단조로운 일상이요? 그거 나쁜 거 아니에요. 놓치고 난 다음에 안타까워 말고 따분함을 따분하지 않게 여겨요. 사랑해도 돼요. 꼭 잡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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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지양(번역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나쁜 페미니스트》, 《위험한 공주들》, 《마음에게 말 걸기》, 《스틸 미싱》, 《베를린을 그리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공저/<김설인> 역13,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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