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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착하게 굴고 떠들어 댄다

『엘리트 독식 사회』 특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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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러한 진실을 뼈를 때려가며 명징하게 직조해내는 걸작이다. 쥐라기 공원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읽어야만 한다. (2019.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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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소장


 

영어 동사 “anticipate”는 하나의 번역어로 옮길 수 없는 말이다. 어떨 때는 “예측하다”의 뜻이 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선수 치다, 선제공격을 가하다”가 되기도 한다. 어원을 따져 거칠게 옮기면 “앞길을 미리 잡아 버린다” 정도가 될 터이며, 이렇게 보면 위의 두 의미가 연결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21세기의 초국적 지배 엘리트 그리고 그 핵심을 구성하는 거대 자본가들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통치의 행태가 바로 이것이라는 게 이 책이 전해주는 핵심적인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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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엘리트의 새로운 체제 관리
 
고대나 중세의 지배 계급과 달리 근대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은 계속 진화하며 모습을 바꾼다. 자본가 계급의 성격을 놓고 18세기의 애덤 스미스는 음모와 탐욕으로 가득 찬 장사꾼들로 묘사했으며, 19세기의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의 착취에 눈이 먼 공장주로 묘사했고, 20세기의 요셉 슘페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옛 세상을 가차 없이 파괴하는 모험가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21세기 초엽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은 또 다르다. 지구와 인류를 행복하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파격적인 사업을 벌이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선각자들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보통사람들로서는 기죽지 않을 수 없는 액수의 돈을 선뜻 내놓고 있으며, 또한 먹고사느라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보통사람들로서는 기죽지 않을 수 없는 고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사업을 벌인다. 그러면 이른바 ‘석학’이니 ‘전문가’라는 명칭을 단 유명 지식인들이 이들 대신 나서서 이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절박하게 중요한 일인지 큰소리로 말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는 바로 이들의 이러한 고상하고도 과감한 결단에 달려 있다고 신나게 떠들어 댄다. 책  『엘리트 독식 사회』 는 21세기 초엽의 자본주의에 새롭게 나타난 지배 계급의 행태를 묘사하고 그 허위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방금 나열한 수백 년간의 진화는 결코 아무렇게나 나타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바로 사회 안에서 자본가 계급이 차지하는 권력의 위치이다. 18세기 서구 사회(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마저도)의 기성 사회 체제와 권력 구조는 압도적으로 귀족적?전통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은 그 내에서 주로 상업이라는 방법으로 화폐를 끌어모을 뿐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권력의 지위에 있는 집단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애덤 스미스가 목도한 것과 같은 무책임하고 기생적인 존재로 머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사회적 생산 과정을 자본가들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새로 손에 넣은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생산 과정을 기계적 과정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휘말려든 노동자들에게 실로 가차 없는 지배를 행하였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들의 권력은 더욱 커져 생산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사회적 과정 전반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이제는 낡은 사회를 파괴하는 혁신가의 역할에 서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오면?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권력을 집중시킨 가장 강력한 지배 계급이 된다. 옥스팜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최상위 8명의 부자들이 소유한 재산 총액은 인류의 가난한 절반인 36억 명이 소유한 재산 총액과 같다고 한다. 파라오와 진시황에서 칭기즈칸을 거쳐 스탈린에 이르도록 초거대 권력을 쥔 이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집중한 종류의 지배 계급은 없었다. 이제 지구 전체가 이 거대한 공룡들이 원하는 대로 짓밟고 다니면서 권력과 부를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쥐라기 공원이 된 셈이다.

 

자본가 계급이 체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권력과 지위가 이렇게 달라졌으므로, 그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의 생물로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권력과 지위를 손에 넣은 이들이 18세기의 장사꾼 자본가들처럼 작은 몸집으로 도토리나 찾아다니는 설치류의 모습을 띨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은 이제 체제 전체, 나아가 인류와 지구 전체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재산을 선뜻 내놓을 줄 아는 존재로 탈바꿈해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감동적인 탈바꿈 과정은 TED와 같은 영향력 있는 미디어를 통하여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해설되고 감상된다. 그러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피 끓는 청춘들은 이를 보면서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는 세상은 가능하다”는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비전을 꿈꾸고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구름처럼 모여든다. 이 구름 떼가 또 하나의 방향타가 되어 더 많은 이들이 다시 이 구름 떼에 합류하여 대세를 이룬다.

 

보기에 따라 아름답고 바람직하기까지 한 이러한 진화 과정에 대해 이 책은 아주 불편하고 핵심적인 사실을 지적한다. 쥐라기 공원이 된 전 세계가 날이 갈수록 생태 지옥?불평등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주된 원인은 이 한없이 먹어치워 대는 거대 공룡들 때문임이 분명하며, 그들의 식욕에 무제한의 충족을 제공해주는 공원 전체의 시스템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원 전체의 생태계가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 공룡들의 식욕에 제한을 가하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영리한 공룡들은 이러한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되려 자기들이야말로 이 공원을 구출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라고 내세우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자기들을 공룡으로 만들어 준 이 시스템을 더욱 온존하고 강화시키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구상은 대체로 민주적이지 않으며, 집단적인 문제 해결이나 보편적인 해결책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간의 재단 등을 활용해서 자선을 베푸는 방식을 선호하며, 시장의 방식으로 문제를 파악하려 하고 무엇보다도 정부를 우회하고자 한다. 요컨대 불공정한 현 상태의 승자와 이들의 승리에 일조한 도구, 사고방식, 가치관이 불의를 시정하는 비결이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견해를 표방한다.”(15쪽) 시스템 전체의 모순을 감지한 공룡들의 anticipation, 즉 “선제공격”이야말로 이러한 현상의 본질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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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부수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지식 소매상(thought leader)”들의 창궐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할 줄 아는 지식인들은 한때 사회 시스템 전체의 안녕을 위해 관찰과 성찰을 행하고 이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며 토론을 이끄는 “공공지식인”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한 번 강연에 수천만 원씩을 받고서 각종 문자 및 영상 매체를 이용하여 토론을 허용치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설파하여 떠들어대는 “지식소매상”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니얼 퍼거슨 같은 이는 훌륭한 역사가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역할은 E. H. 카나 토니 주트와 같이 더 많은 논쟁과 토론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각종 매체에 출연하여 전 세계 지배 엘리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고 거액을 챙겨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높은 수입과 명성에 굶주린 전 세계 지식인들은 그와 같은 이들을 롤 모델로 우러러보게 되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토해내는 온갖 선하고 아름다운 언사들 그리고 거액의 기부 등을 그 자체로 악한 것으로 매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책  『엘리트 독식 사회』 를 읽고 나면 그것들이 이 글 초두에 말한 바 있는 의미의 “선제공격”일 뿐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그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더욱 은폐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할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지배 엘리트들은 억울해할 것임에 틀림없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자신들이 물심양면으로 쏟아붓는 정성을 어찌 이리 곡해한단 말인가. 그렇게 진의가 왜곡되는 일을 방지할 대책이 하나 있다. 혼자 큰돈 쓰면서 아이언맨이나 된 듯 설쳐대지 말고, 그 돈은 세금으로 내고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론장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부패한 정치가들과 무능한 관료로 점철된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은 돈을 버리는 짓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들이 운영하는 자선 재단과 사업체들은 가지가지의 이권에서 자유로우며, 거기에 붙어 있는 이들은 각자의 계산속이 없는가.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에 의해 우리가 그나마 어느 정도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이다. 쥐라기 공원에 평화와 균형이 돌아오려면 먼저 공룡들 스스로가 얌전하게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진실을 뼈를 때려가며 명징하게 직조해내는 걸작이다. 쥐라기 공원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읽어야만 한다.


 

 

엘리트 독식 사회아난드 기리다라다스 저/정인경 역 | 생각의힘
점증하는 불평등과 금융 불안정성을 토론하는 세션, 억만장자와 기업을 위한 세금 감면을 칭찬하고 탈규제 시도에 갈채를 보내는 저녁 식사 자리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엘리트들이 속한 곳곳의 장소로 독자를 매끄럽게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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