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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영 “시를 쓰는 태도가 선명해졌어요”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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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들은 다른 세계의 환기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 안에서 담담하고 멍하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아니라, 이 시간성을 뒤섞고 블록을 쌓아서 유희해 볼 수도 있을 거예요. (2019.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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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온갖 것들의 낮』  과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에 이어 유계영의 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온갖 것들의 낮」 중)다는 고백은 “과거의 어떤 나로부터 현재의 나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살던 시간 같지 않”(『나는 매번 시쓰기가 재미있다』 중)다는 인식을 거쳐 “내가 나를 지나가버린 것을 끝까지 모른다”(「나는 미사일의 탄두에다 꽃이나 대일밴드, 혹은 관용, 이해 같은 단어를 적어 쏘아올릴 것이다」 중)는 말로 다시 돌아왔다.


시간 속에서 흐르는 ‘나’를 지켜보고 있으면 개를 산책시키다 갑자기 햇빛을 본 것처럼 어질한 기분이 든다. 시인의 말대로 지금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 더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게 시라면, 보라색 옷을 입고 나온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는 시적인 시집이다. 읽는 순간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이렇게 긴 오늘”(「자유로」)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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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방귀, 콧노래, 흥, 물고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발표한 지면이 많아서 바쁘게 지내셨구나 싶었어요.


시집이 두 권 몰려나와서 부지런한 사람인 것처럼 되었네요. 특별히 뭔가 바쁘게 하진 않았어요. 시 쓰는 게 바쁜 건 별로 없는데, 수업만 해도 일주일이 그냥 가는 것 같아요. 수업 준비하고, 수업하고, 와서 곯아떨어지고요.


주변에서 시집 반응은 어떤가요?


이번 시집이 제일 낫다고 그래요. 그래서 ‘알아’ 라고 했죠. (웃음) 저는 좋다고 하면 일단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제목부터 독자에게 말을 건네요.


김민정 시인이 제목을 뽑아 주셨어요.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제 시는 이미지나 사유 같은 걸 밀고 나가는 힘보다는 산발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데, 중심에서 그런 파편들을 회전시키는 제목이었어요. 매우 만족하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표지 색은 편집자님과 상의해서 골랐나요?


어떤 색깔 원하냐고 여쭤보셔서 탁한 보라색이라고만 말씀 드렸어요. 세 가지 시안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이 색이 가장 호응이 뜨거웠어요.


트렌디해요. 톤 다운된 ‘인스타 감성’이 있죠. (웃음)


어떤 사람은 퍼플이라 부르거나, 핑크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들었어요. 뒤에 그림은 사람의 옆모습인데, 이 그림도 다 다르게 대답하더라고요. 콧방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콧노래라 한 사람도 있고, ‘흥’이라고 한 사람도 있었어요. 물고기라고 한 사람도 있고요.


첫 시집에서 양경언 시인의 작품 해설 제목이 ‘큰 소리로, 훗!’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웃음이 될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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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류의 세계


시집에 실린 시는 비슷한 시기에 썼나요?


격차가 있긴 한데 거의 순차적이에요. 첫 시집은 20대 때 썼고, 이 시집에 담긴 시는 전부 30대에 썼어요.


전작을 읽고 보니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죽음이 많이 나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첫 시집과 핀 시리즈를 묶을 때는 작위를 피하고 싶어서 그냥 시간에 맞춰 집약된 시만 묶었어요. 일말의 기획성도 배제하려고 했다면, 이 시집에서는 나름 소심한 기획으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죽음이 나왔던 게 아닐까요? 우리의 운명이 종국에 가면 죽음이 나오잖아요.


시간을 생각한 계기가 있을까요?


시에 대한 태도나 목적이 내면에서 선명해진 것 같아요. 이전에는 단순히 재밌어서 쓴다는 태도였다면, 우리가 왜 시를 쓰고 읽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 시기가 있었어요. 도대체 이게 뭐라고 내가 밤을 새고 주말도 반납하고 쉬지 않고 시를 쓰지? 하는 질문이었죠.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나요?


이 세계와 질서를 너무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규정된 세계가 너무 힘들어서, 지금 세계와 조금이라도 다른 질서와 규칙을 가진 세계를 만들어서 거기서 쉬고 있는 거죠. 독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시를 읽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들은 다른 세계의 환기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 안에서 담담하고 멍하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아니라, 이 시간성을 뒤섞고 블록을 쌓아서 유희해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시에 대한 질문 때문에 시간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유계영의 빌려온 시’ 칼럼을 연재할 때도 시를 정의하려는 시도를 많이 한 걸로 기억해요. 예를 들면, 시는 “손과 발이 부러지도록 존재 바깥으로 나가보는 일”인 거죠.


경계해야 되는 일이기는 한 것 같아요. 시 쓰는 일에 대한 엄숙함이 너무 커지면 아무래도 쓰는 즐거움을 잊어버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시 자체에 대한 생각을 그만해야지 싶어요.


그만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나요? 시인의 업은 시 쓰기라 시에 대한 시를 쓰는, 소재가 시가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잖아요. 메타 형식으로 쓰다 보면 그 안에서만 맴돌게 되는 순간이 있을 거고요.


그런 벽을 감지하기 때문에 너무 형식적인 고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필연적인 측면이 있어요. 많은 지면에서 시론이나 어떻게 시를 쓰는지를 써달라고 하거든요. 그때마다 시가 무엇인지 직면하고, 무정형으로 있던 것들을 하나의 창작으로 체계화시켜야 하니 머릿속에 시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는 거예요. 늘 같은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매번 새롭게 쓰고 나서는 바로 부숴버리려고 해요. 그러다 보면 매번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다른 예술 작품에서 단어를 빌려오거나 변용하는 시가 많았어요.


언어가 어떻게 보면 가장 입체적일 수도 있지만, 활자화된다는 건 고정하는 것 같아요. 무언가 생명력을 끊은 느낌? 그래서 영화나 음악, 그림, 사회적인 이슈와 함께 상호적으로 부딪치면서 계속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게 좋았어요.


「치(齒)」는 어느 날 저희가 나눈 대화가 일부 들어가 있어요. 대화에서도 시를 찾게 되나요?


첫 시집은 애틋하기도 하지만 저렇게 자폐적일 수가 있나 싶어서 꼴 보기 싫을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그냥 일상의 피로가 너무 커서 머리로 시를 쓰는 데 많이 골몰했거든요. 그 뒤로 무엇보다 실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에는 흐리멍덩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 실감을 두드리는 말과 장면을 만나는데, 별거 아니더라도 그런 걸 만나면 메모를 해놔요. 그중 오랫동안 기억해도 여전히 감각을 주는 대목이 있으면 시에 옮기는 것 같아요.


동물이 가끔 등장해요. 요즘 세대 시인의 시에서 동물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어떤 한계를 인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의 인간다움이 이제 진작에 밑천이 드러난 거죠. 여러 활로를 모색하다 보니 이제 비인간인 존재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유령이나 그런 다른 몸들이요. 하지만 결국 다른 몸에서도 자꾸 인간을 찾잖아요. 그건 또 어떤 것일까, 궁금해요.


‘떠오르는 루키’라는 수식어가 붙은 적이 있어요. 신예와 중견 중 스스로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나요?


핀 시리즈가 가벼운 소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세 권의 시집이 나왔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중견이라고 놀릴 때가 있어요. 이상하게 발끈하게 되더라고요. ‘아냐, 나 중견 아니야, 아직 10년도 안 됐어’ 하면서요. 아직은 신예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젊은 작가라고 불리면 젊으니까 실수해도 된다는 관대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부담감도 들 것 같아요.


되도록 오랫동안 젊은 작가 안에 머물고 싶은데요. 물리적인 나이를 이야기하는 건 당연히 아닐 테고, 어떤 변화에 가장 기민한 상태를 이르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혹은 아직 대중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한 가능성의 상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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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적인 마음


여러 번 생활인이 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했어요. 시인 유계영과 생활인 유계영은 좀 다른가요?


직장인이 되고자 애썼을 때 얻었던 질병들을 생각하면, 달라지고 싶은데 정말 잘 안 되더라고요. 정해진 일과를 기계처럼 반복하는 삶 속에서 나름의 작은 즐거움을 찾는 전환이 쉽지 않았어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서 출퇴근 길에 많이 울고 다녔어요. 살아있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런 고정적인 생활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서 그때 그렇게까지 힘들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뭘 또 죽은 것처럼 느껴졌는지, 엄연히 살아있었는데요. ‘9 to 6’ 생활을 벗어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처럼 믿었던 것도 치기가 아니었나 싶죠.


나를 이룩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일을 찾고 싶다고 하셨어요.


어쨌든, 일을 하며 사는 삶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직업 안에서 분명 성취하고 보람을 느끼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즘에는 시를 가르치고 수업을 하면서 그 안에서 나름 각각의 인격이 주는 기쁨이 있어요.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로서의 기쁨이지 시를 가르치는 기쁨은 또 아니에요.


시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는 회의인가요?


‘가르쳐서 뭐 할 것이냐’에 가까워요. 어쨌든 자본주의가 받아들이지 않고 불편해하는 존재들인데, 계속해서 이 사람을 양산하는 게 학생들에게 좋은 일일까 생각하곤 해요. 사회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죠. 하지만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선물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요? 시 잘 쓰는 애들 있으면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인생이 피곤할 거라고 얘기해요. 계속해서 직업적인 진로를 생각해라, 시만 좋다고 시만 쓰면 이 꼴이 난다, 경고도 하고요.


반면교사인가요. (웃음) 어린 친구들의 시는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확실히 있어요. 나이대가 주는 불안정함도 물론 있겠지만, 희로애락 중 하나의 감정에 안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느낌이 있어요. 정서의 명징함이 없는 게 재미있어요. 더 미끈거리고 가볍고 깃털 같은 느낌이 있더라고요. 한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아요.


시를 쓰거나 가르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나요?


강아지 산책시키는 게 아주 중요한 일 중 하나예요. 사람들이 개만 끼고 산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억울하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어딘가 갔다 오면 아주 오래 누워있어야 해요. 매일 산책하고 두시간 정도 누워있으면 거의 반나절이 지나 있거든요. 나머지는 일하는 시간이고요.


「개와 나의 위생적인 동거」에 등장하는 개죠?


정말 진심으로 쓴 몇 편 안 되는 시예요. 저는 좀 혐오의 감정에 잘 빠지는 사람이라서 싫어하는 게 너무 많아요. 길거리에서 침 뱉는 사람,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싫어요. 다 공해 같아요. 사람을 별로 좋아하는 성품이 아닌데 개를 산책하고 키우면서 모두와 화해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개는 쓰레기더미도, 노상방뇨한 벽도 오랫동안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요. 누가 침을 뱉건 담배꽁초를 버렸건 새로운 냄새면 재미있어 해요. 집에 돌아와서 저랑 안고 자고 뽀뽀도 하거든요. 결국 제가 지저분해 하던 풍경과 같이 같은 침대에서 한 이불 덮고 잠드는 거예요. 너무나 위생적인 마음으로 세상과 포옹하는 느낌이에요.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뭘 했을까요?


뭘 했을까요, 너무 궁금해요. 저는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때그때 손쉽게 열리는 문으로 그냥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지금 상황으로만 생각해보자면, 동물을 곁에 두는 일을 했을 것 같아요. 애견 미용 같은 일이요.


예전 시집에서 ‘나’에 대해 많이 썼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의 ‘나’는 예전과 좀 다른 느낌이에요. 나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게 ‘미 제너레이션’인 세대의 특징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자신을 고집하는 일의 피로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요. 취향이나 호오를 고정시켜 놓고 난 이런 건 좋아하지 않아,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하고 배제하기 쉽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늙은이 같지만, 부질없게 느껴지거든요. 나라는 고집스러움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내가 무엇이라고 정의한다고 해서 나라는 효과가 세상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나는 나일 뿐이잖아요. 계속해서 변하고, 그 변화를 스스로 잘 감지하지도 못하는 ‘나’를 고집하는 게 너무 바보 같은 일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종국에 제 목표는 무아지경이 되고 싶어요. 나라는 울타리가 없어지고 내가 무엇도 될 수 있는 상태를 가장 원해요. 물론 못하기 때문에 이런 욕망을 갖는 거겠죠.


무아지경이 되려면 극에 달해야 하는데, 시를 써서 극에 이르려면 앞으로 60년 정도는 더 써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그래서 진짜 오래 살고 싶어요.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존경하는 나이 많은 시인 선생님이 한 분 계세요. 100세 넘은 어머니와 부인 병시중을 하면서 그분들의 손발이 되어주시는 거예요. 마지막까지 건강한 사람으로 남는 게 제일 슬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신이 아프고 병든 것보다 끝까지 혼자 건강하다는 게 너무 숭고해 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최후의 무병 장수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내가 없는 상태라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그것도 지금의 생각인 것 같아요. 막상 닥치게 되면 싫어할 수도, 고단해 할 수도, 마땅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고요.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유계영 저 | 문학동네
언어와 세계의 흔들림 없는 경직성을 깨고, 생경하고 불가해한 순간을 생경하고 불가해하게,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해 가능한/사회가 공유한 언어체계로 그려내려 애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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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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