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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세계의 등짝

미안하지만 착한 걸로는 문학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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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탐스러운 세계와, 또 이토록 허점으로 가득한 세계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니. (2019.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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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영화배우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의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영화판의 중심이었던 충무로를 배회하던 때, 선배가 쓰고 있던 시나리오의 인물 가운데 내가 필요하단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두어 달 동안의 설득 끝에 그 일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 중 첫 번째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어서였고, 두 번째는 당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어서였다.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로의 한 극단에 소개되어 기초 연기와 딕션 수업을 받기로 한 무렵이었다. 영화계에서 꽤 영향력이 있다는, 매니지먼트를 맡아줄 사람도 나타났다. 매니져가 될 어른이 나에게 권하길, 항상 책 한 권을 들고 다니라는 거였다. 나는 그때 역시도 지금처럼 가방을 들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방을 들지 말고 사람들이 보게끔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라는 거였는데, 그게 사람들 보기에 지적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누구도, 누구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서 유명 배우의 이름들을 열거했다.

 

나는 유명 배우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연 배우가 되고 싶은 것뿐인데. 내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관심도 없으면서 가방을 드는 건 패션도 아니니 가방 따윈 들지도 말고 책을 들어야 한다니.

 

뻔하다. 구리다. 고작 그 시대는, 안타깝게도 책을 들고 다녀야 지적으로 보이던 시대.  

 

나는 욕지기가 치받쳐 올라 내 결정을 거두어들였다. 물론 내가 간절하지 않아서였겠지만 그 뻔한 기준을 따르는 것도 나를 포장해야 얻을 수 있는 무엇도 당장 싫었다. 그리고 나는 그 페이지를 접기로 했다. 아니 찢어발기기로 한 것이다.

 

대신 가방에 책을 많이 넣어 다니기로 했다. 들고 다니면서 읽기엔 너무 많은 책들은 가방 속에서 낡아갔다. 내가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시 쓰기였다. 계속해서 시인이 되기로 했다. 시인들의 세상은 색으로 치자면 흰색이었고 그만큼 순결했으며 그만큼 지적이었다…면 그것은 뻥이다. 그것은 내가 미리 그려 놓은 스케치에 불과했다. 

 

나는 살면서 착하다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착하다는 말이 품고 있는 답답한 인상들은 나하고는 어울리지도 않으며 표현 자체가 뭔가를 꿰뚫지 못하고 헐렁해서 좋아하질 않는다. 빠릿빠릿하지 않고 일 못하고 눈치 없고 가능성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다.  

 

어느 강연을 마치고 난 후였다. 내 강연을 듣고 내 마이크를 옮겨 잡은 한 주최 측 시인이  독자들에게 나를 재차 소개하기를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선한 사람인지를 자랑하는 시인’이라고 꼬집듯 말했다. 그러더니 내 시에서 몇 줄을 따오면서 이 시를 좀 들어보라고 하는데 아차, 싶었다.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다. 그 시는 착한 메시지를 담은 것이 아닌데 왜 그 시를 착하다고 이야기를 하지? 혹시 너무 안 착하다거나 착한 인성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그걸 표적이라고 삼고 있는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어느 문학상 심사 중에 ‘이병률 시는 너무 착한 척을 해서…’가 수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니, 아무래도 난 참 명실공히 척을 잘 하는 사람이구나 싶다.

 

아, 근데 모르시나본데 미안하지만 착한 걸로는 문학 못합니다. 착한 척하는 걸로 어디 세상 살아집디까? 난 착하지 않고요. 안 깨끗하게 태어났으니 그저 내 마음을 더럽히지 않을 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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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가 되려고 했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시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세계가 너무 민망할 정도로 허술해 보여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놨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데. 그럼에도 이 세계 또한 아찔할 정도로 민망한 일들이 많아서 일일이 쓰자니 감추고 싶고 감추자니 쓰고 싶어서 마구 기분이 돌아버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후회는 1도 없다. 그토록 탐스러운 세계가 있었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애썼고 또 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생에 와서 모두를 채운 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인들이 한심한 것은 “난 젊은 시인들이 치고 올라오는 게 싫어요”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선배 시인도 있다는 것이며, 나에게 ‘밤길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선배 시인이 있는 것처럼 이 세계 또한 여느 졸렬한 세계를 그대로 빼박았다는 것. 그렇다. 시인의 죽은 뿌리로 어찌 나무에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시인의 나무가 죽었다는 것은 뿌리 먼저 죽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여전히 버티고 있는 이 두 세계의 등짝은 어쩔 것인가. 이토록 탐스러운 세계와, 또 이토록 허점으로 가득한 세계가 앞판과 뒤판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니.

 

한 아름다운 청춘이 전속력으로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갔다. 쉽지 않았다. 그 꿈으로 가는 길에도 많이도 흘렸던 땀범벅이 그 꿈의 문 앞에 이르자 눈물이 되어 절절 끓어 흘러내렸겠다. 하지만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의 빼앗아가는 건 그 문 안쪽의 어떤 기운이다. 아주 몹쓸 퀴퀴한 기운 말이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말이란 것이 고작 안 읽더라도 책은 보이게 들고 다니라거나, 젊은 후배들이 성장하는 게 싫다는 그런 세계가 우리의 배를 침몰시키며, 우리를 거짓에 갇혀 살게 하며, 그 무엇에도 심장이 뛰지 않게 만들어준다.   

 

왜 인간은 인간이 만든 세계 어딘가에 대단한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그러고는 고개 몇 개를 넘고 나서야 그것이 괴물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일까. 이름을 센 것으로 지으면 인생에 잡아먹힌다는 말이 있듯 탐스러움의 매혹이란 건 그저 첫맛에만 그치고 말 일인가.

 

인생에는 농밀한 즙이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다. 문득 책상 위에 내려앉는 아름다운 햇살이나 정말로 좋아하는 가슴 뛰는 날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인생 자체에 광채가 스며들 것 같지만 아니다. 비틀린 것, 섞이지 않는 것, 꼬인 것, 일방적인 것들을 칠갑해 놓은 게 우리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을 대단한 것이라 여기고 인생에게 잘해주지 말아야 한다. 모든 걸 걸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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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병률(시인)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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