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회 “살아서 보게 된 그림책, 버킷리스트였어요”
『우주로 간 김땅콩』 꼭 완성하고 싶었던 그림책이에요
평생 그림을 못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다음에 완성한 그림책이에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숨통이 트였어요. (2019. 04. 25)
언제 어디서든 깜찍한 상상을 만들며, 한껏 즐기는 장난꾸러기처럼 살고 싶었다. 그림책 『방긋 아기씨』 , 『엄마 아빠 결혼 이야기』 , 『마음을 지켜라! 뿅가맨』 등을 만들며 아들 건오와 남편과 순탄하게 살았던 1979년생 작가 윤지회는 2018년 2월,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우주로 간 김땅콩』 의 채색 작업만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윤지회 작가는 워낙 일을 좋아했다.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작가로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일이니까 견뎠고 즐겁게 일했다. 병원에 입원하고 이틀 만에 수술, 항암 투병을 하면서 붓을 들 힘이 없었다. 10개월간 그림과 담을 쌓고 살았더니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항암 약을 하나 뺀 지난해 겨울부터 아무도 모르게 붓을 들었다. 하루에 30분씩, 다음달은 1시간씩. 그렇게 떨리는 손을 마음으로 잡고 『우주로 간 김땅콩』 을 완성했다. 『우주로 간 김땅콩』 은 윤지회 작가의 6번째 그림책. 주인공은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엄마 몰래 사라지는 ‘김땅콩’이다. 땅콩이네집은 김땅콩을 찾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파출소에 가고 ‘김땅콩 찾기 캠페인 콘서트’까지 연다. 과연 김땅콩은 정말 우주로 간 걸까?
윤지회 작가는 “이 책을 만들지 못하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고 했다. 김땅콩이 왜 사라질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오는 4월 30일부터 6월 9일까지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우주로 간 김땅콩』 원화전이 열린다.
이 그림책의 밑바탕은 사랑이에요
신작으로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안부가 무척 궁금했어요.
지금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게 신기해요. 어제 열이 많이 올라서 응급실에 가야하나 인터뷰를 취소해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어요. 책이 나온 게 아직까지도 너무 신기하고 너무 감사해요.
어렵게 완성한 그림책이에요.
작년 3월 초에 출판사에 원화를 넘기기로 했는데, 2월에 위암 선고를 받았어요. 처음 간 병원에서는 1기라고 했는데 다음 병원에 가보니 2,3기를 예상했고 결국 4기 판정을 받았어요. CT를 찍을 때 안 보인 암들이 있었어요. 『우주로 간 김땅콩』 채색만 남겨 놓은 상태여서, 아픈 와중에도 계속 마음이 걸렸어요. 제 책이니까요. 아프면서도 이걸 못하고 죽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누구한테 맡겨서라도 내달라고 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증상이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 항상 위염을 달고 있었어요.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지내다가 위염 약을 타러 병원에 갔다가 내시경을 받았어요. 의사 분이 “암”이라고 하는데 그냥 멍해져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집에 오니까 그때부터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가장 먼저 편집장님한테 전화해서 “저, 책 못한다”고 했어요. 위급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수술했어요.
『우주로 간 김땅콩』 은 기적처럼 태어난 책이네요.
아무도 제가 책 작업을 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작년 말에 항암 약을 하나 뺐거든요. 일상 생활을 조금 할 수 있게 되면서 하루에 30분씩, 1시간씩 하다가 12월부터 열심히 작업했어요. 한 장면을 완성하는데 두 달이 걸렸어요. 손이 떨리니까 선도 잘 안 나오고. 찌글찌글하게 선이 나오고. 정말 죽기 전에 꼭 만들고 싶었거든요. 이 책을 만드는 게 제겐 버킷리스트였어요.
그림책은 ‘김땅콩’이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서 시작돼요. 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상황이죠. 얼른 출근하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가 유치원에 안 간다고 말하면 부모들은 긴장합니다.
제 아들 ‘건오’도 자주 그래요. (웃음)
엄마 몰래 유치원에 안 간 ‘김땅콩’은 ‘김땅콩 찾기 캠페인 콘서트’까지 열리자 환호합니다. 모두들 자신(김땅콩)을 보고 싶을 거라 상상하면서 기뻐하죠. 실제 많은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해봤겠죠?
상상은 누구나 해봤을 것 같아요. 저 같은 소심쟁이는 실제로 유치원에 안 갈 생각까진 못했지만요. (웃음) 그동안 제가 만든 그림책을 살펴보면 『방긋 아기씨』 도 그렇고 밑바탕은 사랑이에요. 저는 항상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것 같아요. 사랑받고 주목받고 싶고 사랑도 주고 싶은 마음이 다 연결돼서 나온 그림책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제 내면에 원하는 만큼의 사랑이 아직 안 채워졌나봐요.
김땅콩을 찾기 위해 엄마아빠는 전단지를 돌려요. 이웃에 사는 한 또래 친구는 “아빠 나도 전단지에 나올래”라고 말하죠. 디테일이 살아 있는 장면인데요. 아이들의 상상력이 떠올라서 슬며시 웃음짓게 됐습니다.
편집부랑 아이디어를 같이 짜낸 장면이에요. 아이가 전단지에 나온다는 일은 굉장히 슬프고 힘든 일이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어요.
김땅콩의 견과류 친구들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잣, 밤, 호박씨 등. 주인공을 ‘땅콩’으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 스토리를 풀 때는 사람으로 구성했어요. 그런데 사람으로 끝까지 푸니까 그림이 너무 바글바글해지더라고요. 재미도 없고요. 그러다 편집장님이 캐릭터로 가보면 어떻겠냐고 힌트를 주셨어요. 그러다 땅콩이 떠올랐죠. 아무래도 실제 아이가 사라지는 상황이라면 현실 투사가 돼버리잖아요.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의 한계도 있을 거고요.
“이 그림책을 보다가 진짜 우리 아이가 유치원에 안 가면 어떡하냐”는 리뷰를 보았어요. (웃음) 아마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대리만족하지 않을까요? 걱정하는 부모 마음을 알게 되니까 오히려 가출을 꿈꾸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제 바람이에요. (웃음) 어릴 적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 굉장히 소심했어요. 있는듯 없는듯 있는 아이였어요. 선생님이 항상 발표도 안 시켜줬거든요. 하루는 엄마한테 “선생님이 나 발표 안 시켜준다”고 했더니, 엄마가 다음날 음료수를 사서 보내셨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바로 발표를 시켜주더라고요. 아이들도 크면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많이 생각하잖아요. 자신이 주목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요. 저처럼 수줍음이 많은 친구들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한 장면 한 장면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어요. 이웃집에서 하는 김땅콩 이야기, 김땅콩 찾기 캠페인 콘서트 장면은 너무 귀엽고 무척 애틋해요.
몸이 정말 힘들 때 그린 장면이에요. 지금 봐도 감회가 새롭고 그래요. 그림을 30분 그리고 쉬고, 1시간 그리다가 또 쉬고 그랬거든요. 나는 이제 평생 그림을 못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다음에 완성한 그림이라서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숨통이 트였어요.
숨만 쉬어도 ‘이게 어디야’라고 생각해요
항암 일기를 인스타툰 사기병(@sagibyung)으로 연재하고 있어요. 올해 2월 9일부터 시작하셨는데 벌써 6만 독자 분들이 구독하시고 응원을 보내고 있어요.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SNS에 올렸던 모든 걸 지웠어요. 제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개인적인 사진이나 자료가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게 싫었어요.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었어요. 그러다 투병 수기를 찾아보았는데 4기 환자의 투병기는 거의 없더라고요.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진짜 나을 수만 있다면 항암 일기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병원에서 진료 받으면서도 의사 선생님께 “저 계속 항암 일기 쓸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그러다 『우주로 간 김땅콩』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부터 한 컷씩 올렸어요. 아픈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반응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한 컷 올리다가 두 컷 올리고 세 컷 올리게 됐어요.
곧 책으로도 볼 수 있나요?
가을에 항암일기 에세이가 나올 거예요. 만화를 기본으로 하지만, 글을 더 쓰고 그림도 더 그리고 있어요.
수신지 작가님의 『며느라기』 도 인스타툰으로 연재한 작품이잖아요.
수신지 작가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림책은 호흡이 길잖아요.. 1년씩 걸리니까요. 그런데 만화나 웹툰은 유행에 빨리 대처해야 하니까 그림책보단 호흡이 짧죠. 저는 웹툰 연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조언을 많이 들었어요. 초반에 올린 그림은 몇 컷 없거든요. 그 때는 몸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많이 올릴 수가 없었어요.
항암 일기를 출간하고 싶다고 ‘버킷리스트’에 쓰신 걸 봤어요.
독자 분들이 댓글로 정말 응원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주변을 보면 암 투병 중인 분들이 꼭 있잖아요. 좋은 사례도 많이 알려주셨고요. 제가 치료를 하니까 커피를 거의 못 마셔요. 하루는 큰 마음 먹고 아이스라떼를 마셨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그때 심정을 그림으로 그렸더니 너무 위안이 됐다는 독자 분의 쪽지를 받았어요. 항암 일기가 나오면 『우주로 간 김땅콩』 출간에 이어 버킷리스트 하나를 더 지울 수 있게 돼요.
인스타툰을 보다가 잊히지 않은 문장이 있었어요. “내가 병을 극복한다면 단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다. 힘 없는 자를 도울 것이고 내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달려갈 것이다. 숨쉬는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도 꼭 극복할 것이다.”
숨도 못 쉬고, 응급실만 계속 왔다 갔다 했을 때 썼던 문장이에요. 몸이 너무 아프니까 자꾸 생사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사람에겐 누구나 소명이 있을 텐데, 내 소명은 뭘까? 생각해봤어요. 내가 정말 낫는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도 그때그때 생각나는 문장을 메모하고 있어요. 잊으면 안 되니까요.
아프면서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매순간 감사한 것 같아요. 숨만 쉬어도 ‘이게 어디야’라고 생각해요. 전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요.
독자들의 응원이 평소보다 더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그렇죠. 너무 그래요. 인스타그램에 『우주로 간 김땅콩』 리뷰를 올려 주시면서 제 이름을 태그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 보라고 저 힘내라고 해주시는 거잖아요. 사실 책 한 권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이랑 재밌게 읽었다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뿌듯하고 너무 좋아요.
‘김땅콩’은 아들 ‘김건오’이기도 하잖아요. 건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 것 같아요.
건오를 생각하면서 만든 책이라서요. 건오가 재밌게 읽어줬으면 좋겠고, 혹시라도 건오가 컸을 때 제가 옆에 없다면 제가 지었던 책들을 보면서 저를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엄마가 너를 정말 사랑했다고, 너를 기억하면서 이 책을 끝까지 완성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우주로 간 김땅콩윤지회 글그림 | 사계절
모두가 자신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는 세상의 중심에 멋지게 서고 싶은 아이의 천진함이 담겨있습니다. 결말 속, 땅콩이의 당연하고도 깜찍한 욕심에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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