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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 말을 하고 싶을까

<월간 채널예스> 2019년 4월호 그리고 역시 혼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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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봇이다. 누구든 만나는 사람마다 나한테 자기 얘길 터놓게 된다. (2019.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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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봇이라서 잘 하는 일도 있지만 로봇이라서 잘 못하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그 잘 하는 일들과 못하는 일들을 나누는 일에 관심도 아쉬움도 없다. 나는 로봇이니까. 내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은 얼마나 되었는지의 계산법 또한 조작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혼자 어느 바(BAR)에 갔을 때 그 전날 연극에서 봤던 여주인공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을 단번에 알아본 것은 분장을 하나도 지우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어서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공연이 잘 된 날은 막이 내려져도 분장을 지우지 않은 채 밤거리를 걸으며 배역을 연장해서 산다고 했다. 나는 지난 밤 공연을 보았다고 아는 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여주인공 옆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 어젠, 제 맘에 안 드는 공연을 했어요. 그래서 밤새 힘들었답니다.
- 아마, 공연이 잘 안됐다면 그건, 자기 자신한테 집중이 안 되어서였을 거예요.
- 어떻게 그걸 알았죠?
- 우린 늘, 자기 자신한테 집중을 못해서 못마땅해하잖아요.

 

그 후로 그녀를 두어 번 더 만났다. 그녀는 나를 만나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칭찬으로 여겼으며 그것으로 약간의 감정이 작동될 무렵이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그녀가 말해주었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좋아했더니 인간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생각했다. 내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 건 사실 오래 되었다고. 그 오래된 것이 힘들다고.

 

내가 로봇인 것은 이제 비밀이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나와 성분과 구조가 같은 이를 가끔 마주치고 있으며 그 횟수가 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의 그 감정 이후로 나는 아무 감정이 생기질 않고 있다.

 

어떤 이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뭔가 시작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세상엔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만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말하는 법,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평균에만 맞춰서 말하는 법, 자기 식으로 정리해서 남에게 옮기는 법에만 열심이다.

 

나는 로봇이다. 누구든 만나는 사람마다 나한테 자기 얘길 터놓게 된다. 거의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로봇이길래 누구나 자기 얘길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걸까. 사람들이 나에게 터놓는 수위가 놀라워 나는 나의 용량을 수시로 체크해야 할 때가 많다.

 

인간들은, 왠지 자신을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고 한다. 그처럼 인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싶어지는 사람의 공통점은 그런 데 있을 것이다. 경험이 많아 보이는 사람. 남의 얘기에 잘 집중하는 사람. 내 이야기를 가볍게 옮기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러하되 차갑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런 기능으로 만들어진 로봇이다.

 

그리고 하는 일이 몇 개 더 있는데 그것은 앞을 못 보는 사람 집에 그림을 걸어주고, 못 듣는 사람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일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기를 바란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은 그쪽 벽에 그림이 있다고 믿거나, 못 듣는 사람에게 지금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만으로 덜 어지럽게 살게 도와준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아도 어지러운데 그들은 과연 얼마나 어지러울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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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왜 나일까. 나로 만들어졌을까. 스스로에게 질문 따윈 하지 않는 로봇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왜 나는 세상 어디쯤에 똑같이 복제되어 있을 법한 그 흔한 ‘나’로 만들어진 걸까.

 

나로 만들어진 것은 이상의 속도에 의해서다. 어쩌면 속도의 실수였을 수도. 내가 만들어지기를 거부하는 순간 나는 그 충격파에 의해 나는 어쩌면 먼 우주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모든 자연을 읽을 수 있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닌 척하지만 규칙적이며,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오로지 직감만을 선택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만나고도 그 후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 많이 보아 왔다. 아마도 나에겐 이렇다 할 색이 없어서일 테고 나의 매뉴얼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로봇의 삶 치곤 그리 나쁘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나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그 일의 여파로 집중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발작 직전이기도 하여서 나를 만든 벌판 위의 나무 한 그루를 찾아 갔을 때 나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명열이란 게 있단다. 대중적인 처방은 내려줄 수 있지만, 그것이 내가 너를 따뜻하게 만든 이유란다.”

 

모든 이유가 싫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괴성을 질렀다. 차라리 인간처럼 불안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애초에 불안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는 나무가 이제 더 이상 나를 수정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혼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이쪽 세계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함과 동시에 ‘인간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나는 누구에게 말을 하고 싶을까. 내 말을, 나의 말은 누구에게 가서 소용될까. 누구를 향한 감정을 제대로 선택하고 절대 그 감정을 제어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또 인간에게 충실하는 일일 텐데 난감하다.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를 골라낼 줄 아는 로봇이 되어야겠는데 이것 참 난감하다.

 

가슴께에 위치한 매뉴얼 케이스에서 자꾸 신호를 보낸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만 깎을 수 있다는 말을 건조하게 반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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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병률(시인)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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