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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다가온 원전의 재난

『그라운드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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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제4원전의 상업 운전은 취소되었고, 제4원전은 이후 아예 봉쇄되었습니다. 이후 대만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탈핵을 선언했습니다. (2019. 02. 12)

그라운드제로 사진.jpeg

 

 

우연이겠지만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원전 건설을 재개하기로 한 직후 이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해, 아시아 최초로 탈핵을 선언했던 대만에서 국민투표 결과 ‘2025년까지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해야 한다’는 법 조항의 폐지를 묻는 안건이 통과되었다는 뉴스가 한국으로 날아들 즈음, 이 작품을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보도를 접하며 자연스레  『그라운드제로』 를 떠올렸습니다. 이 작품의 무대로 등장하는 제4원전이 바로 대만 탈핵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4원전 건설안이 수면 위로 떠 오른 때는 1980년대 초, 대만이 아직 계엄령 아래 있던 때입니다. 당시 부지로 선정된 궁랴오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었던 데다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여론은 급격히 악화했습니다. 여기에 전력 수요 상승 곡선이 완만해지는 등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80년대 중반, 제4원전 건설 예산이 동결되기에 이릅니다. 중단된 공사는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재개되지만 2000년 정권이 교체되면서 다시 제4원전 건설 재개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1년이 돼서야 다시 공사 재개 선언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사를 중단한 탓에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데다 그사이 상승한 원재료 가격으로 인해 제4원전 공사 재개 예산은 여러 차례 추가되었고 완공 시기도 여러 차례 연기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십여 년을 흘려보내던 중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이 원전 사고로 이어지자, 원전에 대한 불안이 대만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이 제4원전 공사 재개 관련 추가 예산 140억 NTD(2018년 현재 한화 가치로 약 5,100억 원)를 통과시키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와 함께 제4원전의 설계 변경 및 시공 문제, 원전 다수가 인구 밀집 지역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등이 하나둘 거론되면서 탈핵 운동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국민당 정부는 2013년 2월 25일 국민투표를 통해 제4원전 공사 여부를 결정짓자고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국민투표가 국민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우리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었고, 정부는 린종야오를 중심으로 안전 점검팀을 꾸려 제4원전 평가에 들어갔습니다. 소설에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죠. 여기까지가 제4원전과 관련된 2013년 8월까지의 대략적인 상황입니다. 이 소설의 출간 시기가 2013년 9월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작가가 제4원전의 운명을 점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국민 투표에서 제4원전 건설 재개안이 통과된 뒤 제4원전이 안전 점검을 마치고 상업 운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을 가정하고 소설을 전개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이 작품은 원전 가동이 일으킬 수 있는 수많은 문제와 원전 산업 내부의 온갖 비리, 착취와 차별의 구조, 환경 문제 등 구조적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원전 사고가 초래하는 회복 불가능한 최악의 재앙을 상세히 묘사하고 절망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데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일정 부분 이런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고 원전 사고 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읽다 보면 작가가 그보다는 다른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이 작품이 원전 사고 전후를 끊임없이 교차시킴으로써, 인류 문명에 대한 인간의 환상과 오만이 인간 사회를 어떻게 한 발 한 발 재앙으로 이끌고 가는지, 이 전대미문의 끔찍한 재앙이 어떻게 악용되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제4원전 상업 운전 준비에 직접 참여한 엔지니어, 제4원전의 건설과 상업 운전을 책임졌던 고위 관료와 정치권 인사, 이를 바라보는 미디어, 보육원에서 자란 젊은 여성과 보육원 책임자 등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의 시선으로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자 최악의 재앙의 근원이 된 원전을 바라보는 복잡한 시각을 그려냄과 동시에 이를 통해 인류 문명의 본질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을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 말입니다. 작가가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진 까닭은 위에서 언급한 구조적인 문제들이 설사 개선된다 해도, 심지어 어느 날 원전 산업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이 인류 문명을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원전 문제는 언제든 다른 분야에서 다른 영역에서 복제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누가 이 참사의 원흉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음모를 꾸민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세력인지, 누가 혹은 어떤 세력이 왜 진실을 은폐하려 하는지 밝혀내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작가는 ‘누가 그랬는가’에 대한 답을 사실상 처음부터 보여줍니다. ‘누가 그랬는가’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인간 사회가 한 발 한 발 파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인간 문명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면서 지상 최대의 재앙이 어떻게 없었던 일처럼 묻히게 되는지, 이 과정에서 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차분히 그려나가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현실에서 제4원전의 상업 운전은 취소되었고, 제4원전은 이후 아예 봉쇄되었습니다. 이후 대만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탈핵을 선언했습니다.  『그라운드제로』 속 현실이 다행히 말 그대로 소설 속 이야기로 끝난 셈입니다. 그러니 모든 게 다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탈핵을 결정하기도 쉽지 않지만, 탈핵을 결정한 뒤에도 수많은 현실적인 난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실제 대만 역시 그런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2018년 11월 24일 국민 투표가 진행되었고, 많은 유권자가 ‘2025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지한다’는 조항의 폐지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번 투표 결과 ‘2025년’이라는 원전 폐지 기한이 삭제된 것이지, 대만이 탈핵 정책을 백지로 돌린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만 정부 역시 탈핵 정책을 지속해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탈핵’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빚어지는 모순과 갈등, 시행착오가 소모적으로 끝나지 않기를,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파헤치고 해결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한 과정으로 남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가 바로  『그라운드제로』 가 던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닐까요?


우리는 끔찍한 참사를 끊임없이 겪어왔습니다. 매번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참사로 치닫던 매 순간, 매 단계에서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적어도 최악의 참사까지 가지는 않았거나, 참사를 아예 막지는 못한다 해도 결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겠느냐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낯선 대만 작가가 그리는  『그라운드제로』 의 풍경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고, ‘핵발전’을 둘러싸고 대만 사회가 그리고 있는 궤적이 역시 핵발전에 대한 많은 논의가 촉발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많은 시사점과 질문을 남겨 주리라 믿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핵발전소’와 ‘원전’ 중 어느 용어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컸습니다. ‘원전’이라는 용어가 ‘핵발전’이 초래할 위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고, ‘핵발전’이 더 정확한 용어라는 지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민 끝에, 독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용어가 ‘원전’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이 용어를 택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의 출간을 결정해주신 알마 출판사와 유승재 과장님, 최장욱 대리님, 원자력안전과미래의 이정윤 대표님, 이거옌 작가님, 늘 힘이 되어주는 동료 번역가들과 절친한 벗들, 언제나 물심양면으로 응원해주는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라운드제로이거옌 저/남혜선 역 | 알마
지금 우리가 사는 시공간과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가능한 다른 세계’를 치밀하게 묘파하며 우리의 선택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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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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