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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에 대하여

돌아서 가도 이어져 가는 삶 앨리스 먼로의 『착한 여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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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 경로를 바꾸게 하는 사소한 사고들은 언제나 두렵다. 그렇지만 피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건, 돌발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들을 점검하고 그 길로 가는 것. (2018.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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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내비게이션에 전적으로 맡기고 따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사전에 지도를 꼼꼼히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적’이나 ‘최단 시간’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터널은 답답해서 무섭고, 고가는 높아서 아찔하고, 좁은 골목은 다른 차와 부딪칠까 봐 걱정스러운 초보에게는 특별히 선호하는 평온한 길이 있다.

 

그러나 도로는 지도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2D의 직선이 아니다. 도로 위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차와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초보 시절에는 도로 공사만 맞닥뜨려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핸들을 쥔 손에서 땀이 났다. 경로 연구는 쓸모가 없었다.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끼어들 수 없어서 놓치거나, 고속화 도로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빠져나가지 못했던 일은 부지기수다. 내비게이션은 항상 갑자기 돌아가라고 한다. 준비되지 않은 길로 가라고 한다.

 

저 앞에 벌어진 사고, 일기예보에 없었던 비와 눈, 평소와 다르게 막히는 도로. 몸 안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운전자에게 치명적인 졸음, 급하게 차를 세워야만 하는 복통과 설사 같은 것도 있다. 심지어 타이어 바람이 빠졌다는 경고등 불빛이 들어와 길을 돌아서 카센터를 찾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자동차의 밑 범퍼 아래 붙이는 범퍼 립, 스포일러가 떨어져 끌리는 소리에 기겁해 응급 수리를 불렀던 적도 있었다. 나 같은 계획 집착 운전자는 패닉에 질릴 수밖에 없는 자잘한 일들이 줄기차게 일어난다.

 

미리 준비한 계획을 바꾸게 하는 돌발적 상황은 늘 있다. 인생의 방향을 트는 커다란 사고도, 아주 사소한 사건들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막상 벌어지면 익숙했던 길은 이제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로 변해버린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음을 깨닫는다. 삶은 이렇게 불쑥 우리에게 즉흥 연주를 시킨다.

 

내게도 이런 일이, 이제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아득해질 때면 나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 속 여자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에는 평범하고 잔잔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단조로운 결혼, 혹은 비혼. 사건이라고는 없는 직장. 사랑스럽지만 때가 되면 떠나가기 마련인 아이들. 20세기 중반과 후반을 관통하는 이 소설들에서 여자들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억압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으면서도 남몰래 쉽게 용인되지 않는 감정과 욕망을 품고 산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사건이 생기고, 그녀들의 평온했던 삶은 예상치 못한 궤도로 흐른다.

 

먼로의 단편집 중 하나인  『착한 여자의 사랑』 에도 이런 여자들이 등장한다. 중편 분량인 「착한 여자의 사랑」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검안사 윌렌스 씨가 차와 함께 물에 빠져 사망한 이후의 일을 그린다. 간병인인 이니드는 어린 시절 학교를 같이 다녔던 루퍼트 퀸의 집에 고용되어 그의 죽어가는 아내를 돌본다. 그리고 그 아내에게서 믿기 힘든 진실, 혹은 거짓말을 듣는다. 평생 착한 여자로 살아왔던 이니드는 이제 자기 마음속에 은밀히 숨긴 열정과 양심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린다.

 

「자카르타」에서는 한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켄트와 소녜가 몇십 년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난다. 켄트는 당시 아내였던 캐스와 헤어지고 그 이후에도 여러 여자와 만나고 헤어졌다. 소녜는 남편 코타가 오래전 자카르타에서 열병으로 죽었다고 믿는다. 사라져버린 사람들 뒤에는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코테스 섬」에서는 참견 많은 이웃집 고리 부인의 남편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 어린 신부가 나온다. 고리 씨를 위해 이것저것을 읽어주는 일을 하던 그녀는 그의 부탁으로 1923년 8월의 일요일, 코테스 섬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 아내가 집을 비웠을 때, 집에서 불이 나 남편이 죽었던 사건이다. 그 화재는 고리 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는 끝까지 알지 못한다.

 

「추수꾼들을 제외하고는」에서 연극배우로 사는 이브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딸 소피와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호숫가의 집을 빌린다. 이브는 손주들과 함께 낯선 차를 따라가는 놀이를 하다가 어릴 적 보았던 것 같은 집에 들어가고 거기서 낯선 사람들과 맞닥뜨린다.

 

「자식들은 안 보내」는 우연히 연극 〈외리디스〉의 주연을 맡게 된 폴린의 감정을 따라간다. 남편과 두 딸, 남편의 부모와 함께 휴가를 보내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자기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자기 몸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강렬한 감정 때문에. 그러나 감정이 일으킨 결과는 그 감정보다 오래 남기 마련이다. 

 

「돈 냄새가 진동할 만큼 부자」는 데릭과 앤 부부, 그리고 이웃에 사는 로즈메리의 관계를 로즈메리의 어린 딸 카린의 눈으로 그린 작품이다. 소녀는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욕망을 예민하게 느끼고 거기서 자신만의 환상을 쌓지만, 그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에서는 한 여자가 헤어진 약혼자 R에게 편지를 보내며, 남이 모르는 진료를 오랫동안 행했던 아버지와 가사를 돌보아주는 늙은 배리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아버지의 비밀과 딸의 비밀이 엇갈리고, 그 위에 어린 악의의 그림자 속에서 딸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 엄마의 꿈」은 딸이 서술하는 어린 엄마의 이야기이다. 질은 남편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후에 아기를 낳는다. 예민한 아기는 엄마를 거부하여 계속 울어대고, 신경쇠약인 시누이 아이오나가 아기를 맡는다. 그리고 아이오나가 집을 비운 어느 날, 질과 아기는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

 

길게 설명할 거리도 없는 파편적 일상 같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표면의 간결한 문장들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 누구도 포착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들이 있다. 우리가 놓쳐버린 기회, 앞으로 올 것만 같은 기회, 확증할 수 없는 의심, 확증하고 싶지 않은 의심, 실현할 수 없는 욕망, 기필코 저질러버린 욕망. 그리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끄는 열정. 어떻게든 이어져 가는 삶이 이 소설들 속에 있었다.

 

인생의 길이 한 번 정해지면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학교에 가거나 가지 않거나,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떤 직업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이런 결정들로 진로가 정해지면 그대로 쭉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어제의 변주이고, 내일은 오늘의 또 다른 각색. 삶에는 돌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 닥쳐올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그런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모든 게 이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으면, 무언가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다른 소설 제목  『디어 라이프』 처럼. 삶은 살뜰하고 소중하며 필사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착한 여자의 사랑」에서처럼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고 이제까지의 궤도가 바뀌려는 순간, 삶은 절실해진다. 「우리 엄마의 꿈」에서는 일어날 뻔했으나 벌어지지 않은 사고가 있고, 이로 인해서 그들의 삶은 잠깐 달라졌다가 다시 일상이 되어 흘러간다.

 

길은 바뀐다. 변화가 닥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착한 여자의 사랑」의 이니드처럼 “그 가능성이 다가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는 것”(127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돌발 사고가 생겼을 때도 우리에겐 선택이 있다. 이 길로 갈지, 저 길로 갈지. 먼 곳으로 갔다가 돌아올지, 가던 길로 계속 가버릴지. 고통과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길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 「돈 냄새가 진동할 만큼 부자」에서 카린이 상처를 입고도 제자리로 돌아와 변화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카린이 얼마나 변했는지, 카린에게 독립적이고 예의 바르며 지혜롭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는지 몰랐다. 자신이 얼마만큼 혼자 설 수 있는지 깨달을 때 그녀가 이따금 느끼는 의연한 승리감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424쪽)

 

예상한 경로를 바꾸게 하는 사소한 사고들은 언제나 두렵다. 그렇지만 피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건, 돌발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들을 점검하고 그 길로 가는 것. 그것이 언젠가 말한 ‘자기 길을 가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갈 길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리로 감으로써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나는 빙빙 돌기도 하고, 느릿느릿 기어가기도 하며 목적지에 도달했다. 혹은 예상치 못한 목적지에 도달했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맘에 들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서 가도 되는 것이 우리의 살뜰한 삶이며 거기에는 아주 작은 승리감이 있다. 승리감 따위 없대도 삶은 이어진다.


 

 

착한 여자의 사랑앨리스 먼로 저/정연희 역 | 문학동네
사랑의 모호함, 예기치 못한 길로 인도하는 열정, 격식을 차린 사회의 표면 아래 도사린 긴장과 기만, 그리고 이상하고도 종종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예리하면서도 명징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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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현주(번역가)

소설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로맨스 추리 소설을 쓴다. 그리고 드라마를 본다.

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저/<정연희> 역15,120원(10% + 5%)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평을 들으며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앨리스 먼로는 이제 한국 독자에게도 그 이름만으로 신뢰감을 주는 작가가 되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착한 여자의 사랑』은 1998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품세계가 한층 원숙해지고 무르익은 먼로의 중·후반기 대표작 중 하나다. 먼로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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