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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돈의 힘에 대하여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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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중요하다. 돈은 소중하다. 수고하셨어요, 반응이 좋더라고요, 라는 격려와 칭찬이 중요한 것만큼 돈도 똑같이 중요하다. (2018.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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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안식년을 누리기로, 1년간 쉬어가기로 마음먹고 나니, 왠지 평소보다 더 용감해지고 과감해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1인 기업가인 프리랜서에게 안식년이란 곧 365일의 무급휴가고, 자칫하면 원치 않는 366일째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니 무조건 내키는 대로 질러버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자, 신중해지자. 레이아웃을 잡은 후 큼직한 그림을 그려 나갔다. 한곳에서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에서 한두 달씩 체류해보자 마음먹었으니, 지역별로 대략의 생활 물가를 검색해 데이터를 쌓고, 숙소와 항공권 비용을 더해 예산을 세웠다. 필수 경비를 산출하고, 적절한 비율의 여윳돈도 가늠했다. 당연하지만, 여윳돈이란 넉넉할수록 좋다.

 

그리고 돈을 모았다. 여행 작가로 오래 일한 만큼 여행 경비 모으는 것에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고 자부하지만(답은 오로지 적금뿐입니다), 중장기 체류 비용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와, 빡빡했어요. 하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여행이든 체류든 필요한 건 사실 두 가지다. 여권과 돈. 딴 거 없다. 그것만 챙기면 준비 끝이다. 한 해의 생활비를 모았다는 것은, 그 1년간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후의 일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안식년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용감해졌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용기’가 생긴 것이다.

 

일을 거절한다는 건 나에겐 참으로 굉장한 사건이다. 20년간 쉬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제안을 거절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거절은커녕, 작업 비용 흥정도 쉽지 않았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그다음 기회까지 사라질까 두려워, 기약 없는 나중을 위해 오늘을 인질로 잡힌 채 일했다.

 

그런데 1년 치 경비를 모아놓고 나니, 어차피 나는 곧 떠난다 이거야! 하며 용감해졌다. 뭐, 그래 봤자 무리한 일정의 일을 거절한다든가, 받을 만한 고료를 요구한다든가 등의 상식적인 행동들이다. 하지만 나에겐 큰 의미였다. 해달라는 대로, 일정이든 분량이든 혼자 끙끙대며 다 맞춰줬지만 정작 나에게 득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혼자 모든 걸 짊어진 프리랜서는 기댈 곳도, 마음 둘 곳도 없다.

 

그때까지 나를 옭아매던 일 하나를 그만두었다. 오랫동안 도돌이표처럼 수정을 거듭하던 일에서 손을 떼고,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그 작업 폴더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삭제했다. 일주일 전에 먹은 칼국수까지 싹 소화되는 것 같았다.

 

돈이 넉넉하다는 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지겠어, 뭐든 다 하겠어! 라는 것보다 이게 먼저다. 하기 싫은 일 안 하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봐도 되는 게 아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혹은 반대로,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 일이나 사람이 꽤 좋아지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이만큼 덜어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돈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인가.

 

‘저희가 예산이 너무 없어서요’라며 고료를 깎는 대신 맛있는 걸 한턱내겠다는 업체 담당자를 종종 본다. 설마, 사비는 아닐 테고 법인카드겠지요? 전혀 반갑지도 고맙지도 않다. 그럴 거면 그 법카로 카드깡이라도 해서 단돈 만 원이라도 더 줬으면 좋겠다. 카드깡은 합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지간히, 정말 어지간히 관계가 좋은, 오래되고 편안한 사이가 아니라면 굳이 차려입고 나가서 형식적인 안부를 나누며 식사하고 싶지 않다. 생각만 해도 명치가 쑤신다. 상대방 역시 결코 편하지도 즐겁지도 않을 것이다. 서로 네, 네, 하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겠지. 양쪽 모두 사회생활용 미소를 얼굴 가득 그윽하게 띄우곤 있지만, 담당자 역시 일개 직원일 뿐 오너가 아니잖아. 물론 해당 업체의 오너가 직접 왕림하시어 번쩍이는 법인카드를 기세 좋게 휘두른다 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때로는 심지어 흥에 겨운 나머지 나에게 감정적인 접대부 노릇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 쫌!

 

그러니, 그냥 돈 줘요.

 

내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당신네도 돈을 제대로 지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돈은 중요하다. 돈은 소중하다. 수고하셨어요, 반응이 좋더라고요, 라는 격려와 칭찬이 중요한 것만큼 돈도 똑같이 중요하다. 격려, 칭찬이 나의 지나간 수고를 감정적으로 보상한다면, 돈은 내가 오늘을 즐겁게 보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 돈이 있어야 뭘 하든, 아무것도 안 하든 할 수 있다.

 

돈 타령이라니 천박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어, 돈은 영원하지 않아. 소위 멘토라는 고고한 인간들은 이런 소리를 한다. 내가 언제 영원한 것을 바랬던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내 뜻대로 보낼 자유와 쾌적함을 원한다고 했지, 영원 타령을 했었나?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아끼고 사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즐겁고 행복해질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걸 실천할 돈만 있으면 된다. 그럼 내가 알아서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볶아 먹으며 셀프로 행복해질 테니까.

 

때도 몸을 충분히 불려야 잘 밀린다. 돈도 평소에 야금야금 써봐야 한 방 크게 쓸 때 제대로 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아끼고 보살피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내가 열심히 번 돈은 내가 써야 하며, 나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 챙길 건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그 돈 다 날아간다.

 

차곡차곡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것 같지만 내가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쓴다. 거참 희한하네, 좀 모았다 싶을 때면 왜 꼭 돈 나갈 일이 생길까 싶죠? 실은 다른 이들이 누울 자리를 보고 비비는 것이랍니다. 특히 비혼 여성의 경우, 집안의 돈주머니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넌 애도 없으니 여유 있지 않느냐는 건데, 여보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

 

주머니를 열기 전에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나는 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가? 과거의 회수율은 어땠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자의로 주머니를 여는 것인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것인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돈이다. 돈이 있으면 용기가 생긴다. 돈주머니를 딱 쥐고 있어야 이거다 싶을 때 예스를, 아니다 싶을 때 노를 말할 수 있다. 더없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안식년 덕분에 여러 가지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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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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