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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감자, 여름엔 옥수수

이제 내 일은 기다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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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 옥수수가 익어가는 부엌’(덕분에 더욱 더워졌다)을 흐뭇하게 보고는 숨을 돌리러 방으로 간다. (2018.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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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요새 한국 여름은 악명이 높다. 살인적인 날씨, 기록적인 더위, 불구덩이에 휩싸인 듯한 거리! 왜 아니겠는가? 낮에 집에 있으면 파김치처럼 늘어져서는 ‘미치게 덥군’, ‘아유 더워 죽겠네’를 번갈아 말하며 탄식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까슬까슬한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자다, 잠깐 뒤척이기도 하는 여름밤의 선잠이 좋다. 맹렬하게 우는 풀벌레 소리가 좋다. 한낮에 정수리가 녹을 것 같은 기분, 따가운 빛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좋다. 살균되는 기분이랄까.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선풍기 앞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순간도 좋다. 왜냐고? 나처럼 몸이 냉한 사람에겐 땀을 낼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이니까! 유독 여름을 힘들어하는 사람 앞에선, 괜히 못 견디겠단 시늉을 하지만, 하하하! 사실 나는, 이 여름이 정말 좋다. 여름엔 또 맛있는 먹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잘라놓은 수박을 선풍기 앞에서 먹어치우고, 자두 두 개로 입가심을 하는 맛이란! 수박의 단 맛과 자두의 단 맛은 비슷하고도 다르다. 수박이 수영장에서 깨무는 얼음설탕 같은 맛이라면, 자두는 계곡에서 쪽쪽 빠는 설탕젤리 같은 맛이다. 둘 다 정말 좋다! 곧 백도와 황도, 여름 잡는 여왕들도 출몰하겠지. 여름은 이들과 함께 무르익을 것이다.

 

여름간식으로 빼놓으면 섭섭한 게 ‘옥수수와 감자’다. 수박과 자두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자색감자와 찰옥수수로 채우기로 한다. 고구마처럼 색이 붉은 자색감자를 한 알 한 알 씻어 냄비에 넣는다. 소금을 약간 치고 감자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불에 올리고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끝! 간단하다. 감자가 익을 동안 찰옥수수 열 개의 껍질을 벗긴다. 옥수수 껍질을 벗겨보았는가? 껍질을 벗겨보기 전엔, 이 녀석들이 얼마나 수줍음이 많은지, 자기 방어로 똘똘 뭉친 녀석들인지 알지 못한다. 백 겹이나 되는(과장을 좀 보태서!) 껍질을 힘들게 벗기고 나면, 마지막 한 겹이 남는다. 좋아하기엔 이르다. 마지막 껍질 아래 엄청난 양의 ‘수염’이 옥수수 알갱이들을 감싸고 있다. 옥수수 쪽에서는 결코 먹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수염은 생각보다 질기다. 떼어내는 게 귀찮기도 하고 옥수수에게 ‘지나친 모욕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수염 째로 찜통에 넣어버린다.
 
이제 내 일은 기다림뿐이다. ‘감자와 옥수수가 익어가는 부엌’(덕분에 더욱 더워졌다)을 흐뭇하게 보고는 숨을 돌리러 방으로 간다. 텔레비전에서 한국과 대만 초등학생들의 야구 중계(재방송)를 해준다. 초등학생 야구가 의외로 재미있다. 해설자가 말하길, 지금 공을 던지는 우리나라 투수는 홈런을 맞으면 곧잘 운다고 한다. 귀여운 녀석. 속으로 저 어린이가 홈런을 맞아 우는 모습을 딱 한 번만― 보았으면, ‘몰래’ 바란다.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대만 선수의 프로필 소개를 듣다 폭소가 나온다. 별명이 글쎄 ‘작은 얼간이’라지 않은가.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웃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한 마디 한다.
 
“우리 집엔 큰 얼간이가 사는데!” 
 
큰 얼간이인 내 기분이 막 상하려는 순간, 냄새가 난다. 탄내가! 진동한다! 부엌은 물론 거실 구석구석, 연기로 가득 차서 산신령이 나올 것 같다. 감자가 냄비 바닥에 늘어붙어 타들어가고 있다. 창문을 죄다 열고, 한참이 지나서야 연기가 빠진다. 이게 다 작은 얼간이 때문이다.

 

옥수수는 더 익게 두고, 까맣게 탄 감자알들을 그릇에 옮겨 담아 시식을 한다. 일부가 좀 탔어도 이 자색감자, 정말 맛있다! 하지 지나 수확한, 햇감자라서 그런가? 포슬포슬한 게 밤이나 고구마보다 맛나다. 감자 탄 게 뭐 대수인가, 아직 신에게는 열 개의 옥수수가 남아있습니다! 혼자 농을 치며, 감자와 옥수수로 즐거운 오후. 이번 여름, 또 뭐가 남아있을까? 생각하면 줄줄 나온다. 옥수수, 감자, 수박, 자두, 복숭아, 팥빙수, 맥주, 냉면, 토마토, 삼계탕……. 여름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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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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