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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는 끼치지 않으려고요

우리는 대개 누군가와 얽혀 일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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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노동이 내가 세운 계획에 알맞게 귀속되길 바랐던 일들을 돌아본다. (2018.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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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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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파트 단지에 붙은 안내문이 화제였다.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위해 지상에 차량을 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방편으로 택배 기사의 차량 진입을 금지하겠단 의지가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지하 주차장 진입로의 높이가 택배 차량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차량 진입 금지는 도보와 카트 배달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넓은 단지를 도보로 배달하는 것은 일이 확연히 힘들어진단 뜻이다. 또한 한 단지에 오래 발이 묶인다는 뜻이다. 정해진 급여 없이 배송 건당 수수료를 받는 택배 기사들에겐 일은 힘들어지는데, 되려 소득은 줄어드는 괴이한 제안이었다.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택배 기사의 노동강도 증가/소득 감소로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심지어 조심스러운 기색도 없이 안내한 이 단지는 결국 뭇사람들의 분노와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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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기사의 노동에 대해 세심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그런 식의 안내문은 붙을 수 없지 않았을까. ‘배달받는 마음’은 익히 알지만 ‘배달하는 마음’은 헤아려 본 적 없는 ‘무지’가 어쩌면 이 사태의 본질은 아닐까.

 

참고로 한국교통연구원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택배 기사가 가져가는 수수료는 배송 건당 654원이며, 월평균 순수입은 243만원이라 한다. 서울노동권익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이 순수입은 일평균 14시간씩 주6일 노동을 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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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 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니까 슬쩍 버리기도 쉽다. 그렇게 편리를 누릴수록 능력은 잃어간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은유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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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택배 사건도 그렇고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경비원 해고 사례도 그렇고, 최근의 ‘아파트 단지발’ 사건들이 유독 도드라지긴 한다. 하지만 그런 극단의 옆에 나를 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일하는 마음을 헤아려 본 적 있느냐’는 질문 옆에 나를 세워 본다면, 나도 부끄러운 게 많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타인의 처지와 노동을 세심히 헤아리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노동이 내가 세운 계획에 알맞게 귀속되길 바라는 일들로 빼곡했기 때문이다.

 

굿즈 제작 일정을 맞추기 위해 시안을 요청하면서 시안 작업에 촉박한 데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하고, 이벤트 내용을 서로 확정해놓고도 성에 차지 않아 여러 번 수정 요청을 했던 일 같은 것 말이다. 그 뒤에는 갑작스레 야근해야 했던 디자이너가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일이 밀려오는 와중에 한 번 확정한 일을 번복해야 하는 거래처 담당자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폐를 끼친 많은 일이 있었고, 내 기억에 남지 않은 사례도 많을 것이다.

 

‘제작 일정’을 맞추는 것이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은 당연하고 중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MD의 능력이란 책을 많이 팔거나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뿐 아니라 타인의 노동에 끼칠 영향에 대해 세심히 고려하며 일을 성사시키는 것도 포함된다고 다시금 생각해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고, 나는 당장 내일부터 또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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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 에는 편집자와 저자, 번역자, 북디자이너, 출판제작자, 출판마케터, 온라인서점 MD, 서점인, 1인출판사 대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가 출판-서점업계 종사자로만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래 남의 업계 이야기는 들어보면 좀 좀 재밌기도 한 법이고, “일로 연결된 다른 이들의 노동과 처지를 헤아려 보자”는 메세지는 업계와 직무를 초월해 곱씹어 볼 만하다.

 

출판사 ‘제철소’는  『출판하는 마음』 에 그치지 않고 계속 ‘일하는 마음’ 시리즈를 낼 계획이라고 한다. 나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다른 업계의 이야기를 손꼽아 기다려 보려 한다. 누군가의 ‘일하는 마음’을 읽으며 계속 곱씹어 보려 한다. 가급적 폐는 끼치지 않겠다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개 누군가와 얽혀 일하는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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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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