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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크리스마스 이브를 떠올리며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 정희상 저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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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대륙 위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살들의 진상이 밝혀지는 일에 첫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채의진 선생님입니다. 평생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바친 선생님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평전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2018.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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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가을, 나무 냄새 가득한 서각집 미목. 20대 혈기왕성한 새내기 기자 정희상은 언론인으로서 부푼 사명감을 안고 작은 서각집의 문을 열었다. 50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서각가 채의진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문경’, ‘민간인 학살’, ‘군부대’. 잊으려 애썼던 기억 저편의 아픈 앙금들이 처음 보는 그 청년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포기하자, 포기하자 다짐했던 20년의 세월이 주먹을 꽉 쥔 정희상 앞에서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그 순간 대한민국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의 첫 불꽃이 튀어올랐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18년 봄, 정희상은 여전히 그때 그곳의 향기와 촉감을 떠올린다. 50대 채의진의 카랑카랑한 안광과 떨리는 목소리는 그의 기억이 아닌 마음에 박혔다. 살아있을 때 주었다면 참 좋았겠지.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 를 쓰다듬었다.

 

사실 ‘채의진’이라는 이름이 낯설어요. 김훈중위의문사, 제이유 다단계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취재하며 다양한 분들을 만났을 텐데 그 중에서도 채의진 선생님의 평전을 쓰게 된 이유를 알고 싶어요.

 

재작년 6월 28일 채의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 6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공동 수상한지 꼭 사흘만의 일이죠. 아직도 상을 전달 받으며 인터뷰를 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지병 때문에 침상 위에서 상을 받아야 했거든요. 몸은 비록 망가져서 병색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지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바로 그날처럼 말이죠.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늘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본인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평전이 아니라 자서전이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채의진 선생님의 장례씩에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자제분들과 평전에 대하여 논의를 했고 오랜 이야기 끝에 평전을 작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공식적으로 하는 얘기에요. 솔직하게 대답을 하자면 처음 질문을 그대로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채의진’ 이름 석자가 사람들에게 낯선 단어더라고요. 그토록 오랫동안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힘을 쓰셨음에도 그 이름이 그저 시간 앞에 스러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민간인 학살은 먼 베트남 땅이나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한반도 대륙 위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살들의 진상이 밝혀지는 일에 첫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채의진 선생님입니다. 평생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 바친 선생님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평전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채의진 평전’이라고 해서 딱딱한 사실 나열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평전 보다는 소설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평전 작업을 하기 전에 다른 평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평전을 찾아 읽지 않더라고요. 왜 평전을 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끝에 원인을 찾았습니다. 기존의 평전들은 학교에서 보던 역사 교과서 같았어요. 역사적 사실들이 줄줄 서술된 책 말이에요. 채의진 선생님의 인생이 단순히 정보 전달에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열했던 그의 투쟁과 넘치는 열정, 의지 같은 깊은 감정들에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기자로서 늘 팩트 전달에 집중했던지라 오감을 자극할 평전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그때 아이디어를 준 게 바로 최빛 작가입니다. 최빛 작가는 책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함께했어요. 어떻게 평전을 써야할까 고민하던 중에 최빛 작가에게서 의견이 나왔습니다. 소설처럼 쓰자고 말입니다. 팩트에 살을 붙이고 날개를 달아 시간과 기억을 생생하게 살릴 소설처럼 평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과 단어들을 사용했죠. 이 부분에서는 최빛 작가의 역할이 굉장히 컸어요. 덕분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 같은 평전이 탄생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어요. 굴곡진 인생을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책을 쓰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저자에는 두 사람만 나와 있지만 이 책 한 권을 위해 여러 명의 작가가 함께 일을 해야 했어요. 자료조사부터 시작해 해야 할 일이 많았거든요. 이미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쓰려니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시간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일들이 필요했죠. 그래서 채의진 선생님의 삶에 깊이 얽혀 있던 분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 날 학살의 현장에서 같이 살아남은 조카 채홍락씨, 채의진 선생님 삶의 때로는 빛이자 나무 그늘이 되어주었던 친구 김주태씨와 제자 유복연씨,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뭉쳤던 역사학자 이이화씨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김원웅 국회 의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의진 선생님의 마지막 투쟁인 소송을 진행한 박갑주 변호사까지 이 책 한 권을 위해 사회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가슴 속의 채의진을 다시 꺼내어 주셨어요. 이 자리를 빌어 책이 나오기까지 힘써준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오랜 세월을 그리고 있는 만큼 그 안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았겠죠? 채의진 선생님의 인생을 정리했던 그 과정이 궁금해요.


정말 많은 에피소드들이 인터뷰에서 쏟아져 나왔어요. 제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들도 많았죠.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책이 한없이 늘어날 뻔했습니다. 책의 분량 조절을 위해 빠진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아요. 간혹 70년의 삶을 한 권에 담으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무리였나 싶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기준을 세우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어요. 


 채의진 선생님의 인생을 정리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인간 채의진과 진상규명 운동가 채의진의 사이에서 균형을 조절하는 일이었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나요? 채의진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앞에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대나무 같았던 그 역시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습니다. 막연히 추앙만 받을 성인군자는 아니었단 이야기에요. 그도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그의 인간적인 면과 운동가적인 면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작가이자 현재 시사IN에 재직 중인 기자기도 하시죠. 기자 정희상과 작가 정희상, 어떻게 다른가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기자와 작가 이 두 타이틀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죠. 기자 정희상으로 세상 앞에 설 때에는 누구보다 냉정해집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의 부조리 앞에 서지만 진실을 추적하는 일에는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거든요.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취재할 때 마치 검사 같다고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누구보다 취재원이나 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다만 주관적인 견해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피하려 더 무뚝뚝하게 대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작가 정희상이 되어 글을 쓸 때는 조금 다릅니다. 책을 쓸 때에는 기사에 드러낼 수 없었던 저의 개인적인 감정들을 꺼낼 수 있거든요. 한 자 한 자 적을 때마다 그 때의 그 순간 취재를 통해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금 휘몰아치고는 합니다. 때로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일면을 보며 분노를 토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거대한 권력 앞에 쓰러진 피해자들을 보며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울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책을 쓸 때면 강하게 드러낼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책은 기사보다 훨씬 솔직한 심정으로 쓰게 되곤 하죠. 이 점이 기자 정희상과 작가 정희상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여기서는 작가 정희상에게 조금 더 집중할게요. 작가로서 요즘 가장 관심 갖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작가라고 이야기하려니 조금 쑥스럽네요. 아직은 기자라고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한가 봅니다. 하지만 작가 정희상, 저자 정희상으로서의 행보를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채의진 평전은 제가 저자로 참여한 여섯 번째 책이에요. 앞으로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책이 나오길 바라고 있어요. 올해 안에 또 다른 책으로 사람들과 교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되면 작가 정희상에 조금 더 익숙해 질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들 혹은 독자가 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편하게 해주세요.


1949년 12월 24일 국군 부대가 마을 주민 86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역대 정부는 이 사실을 은폐 조작했습니다. 문경의 작은 석달마을은 행복해야할 크리스마스 이브에 피로 물들고 말았죠. 소년 채의진은 그 날 아홉 식구를 잃고 형님의 시신 밑에서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모든게 망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그는 스스로를 갈고 닦았어요. 그리고 저와 함께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시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에만 힘쓰셨습니다. 


 이 책은 그런 채의진 선생님의 삶을 복기하며 쓴 평전입니다. 생전에 선생님이 늘 하시던 말이 있어요. “나는 쓰러지고 싶어도 맘대로 못 한다. 그날 억울하게 쓰러져간 분들의 원혼이 내려다보며 학살 진상을 규명할 때까지는 저승 근처에 한 발짝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제 선생님의 영혼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자기의 남은 과업이 잘 해결되고 있나 말입니다. 그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이 책이 선생님께서 못다 이루고 떠난 남은 학살 사건의 궁극적 해결에 작은 밑돌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빨간 베레모정희상 저 | 시사IN북(시사인북)
국가가 인권을 얼마나 유린해왔는지 힘없는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국가란 괴물에 맞서 어떻게 싸워왔는지 생생하게 기록한 대한민국 인권투쟁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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