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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의 민주주의

여자들은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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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손에 맥주 잔을 들고 흰 셔츠를 입은 그들의 단체사진을 바라보며 ‘경제’의 얼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통령, 비서실장,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러 기업인들이었다. (2018.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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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엣지 파인Robert Edge Pine, <독립을 표결하는 의회Congress Voting Independence>, 1784~1788

 

 

한 진보적인 매체가 헬조선에 대한 담론을 기획하고 모두 남성 필자들의 글로만 채운 것을 보고 굉장히 낯설었던 적이 있다. 어떻게 한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담론을 기획하면서 오로지 남성의 입만 빌릴 수 있지. 내게는 심하게 낯설었지만, 매체에 글이 실려 나올 때까지 그 기획에 참여한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 자체가 내게는 ‘헬조선’이었다. 어떤 자리가 특정 성별로만 구성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은 생각보다 드물다. 이 이상한 일이 매우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필라델피아에 갔다가 호텔 근처라서 그냥 식사하러 들른 식당이 알고 보니 역사적 장소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는 순간 묘한 분위기와 마주쳤다.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이나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들이나 복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조명은 왜 이리 어두컴컴한지 미스터리 영화의 세트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18세기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당시 의상을 입은 직원들이 정중한 서비스를 한다.


인디펜던스 홀 인근에 있는 ‘시티 태번 City Tavern’은 1773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레스토랑이다. 본래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은 건물이다. 믿거나 말거나 18세기 요리법으로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상을 수상한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나는 치킨 팟파이를 주문했는데 내가 먹어 본 치킨 팟파이 중 가장 맛있었다. 내 입맛이 18세기와 어울리는 걸까. 주석잔에 물이 나오고 음식과 함께 제공하는 빵도 18세기 영국에서 먹던 빵을 재현했다고 한다.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했다.


미국 독립의 역사는 필라델피아와 보스턴 곳곳에 남아있다. 워싱턴 D.C.를 수도로 삼기 전에 필라델피아가 미국의 수도였다. 1776년 7월 4일 미국의 13개 주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공포한다. 필라델피아의 올드 타운은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시티 태번은 독립 선언 당시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새뮤얼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등 주요 정치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흔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라 불리는 이들이 자주 모여 식사를 했다.


학자들이 선술집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했다고 말할 정도로 당대의 정치인이나 지식인, 상인 등은 술집에 모여 정치적 의제를 논하고 연대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대도시의 선술집, 커피하우스, 클럽 등은 정치와 예술을 토론하는 ‘공공장소’였다. 그 장소에 모이는 사람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고 예술적 취향을 기르고 정보를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알아갔다.


그 선술집에서 민주주의가 나오는 동안 여자들은 다 어디에 있었을까.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 위해 각 주의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내 애비게일 애덤Abigail Adams는 남편의 조언자이며 페미니스트였다. ‘건국의 아버지’들에 그의 역할은 가려졌지만 오늘날은 그를 ‘건국의 어머니’들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되어도 흑인 노예는 여전히 백인 주인에게 종속되었듯이, 여성들은 참정권도 없이 가정에 종속되어 있었다. 선술집에서 탄생한 민주주의는 남자들만의 민주주의였다.


지금은 종방한 MBC <이슈를 말한다>는 시사토크를 하는 방송이다. “MBC 해장국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며 진행자는 말문을 연다. 남성 진행자와 주로 남성출연자들이 한 주간의 시사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해장국집이라 부르는 이 방송의 무대세트는 18세기 태번의 모습과 흡사하다. 먹고 마시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탁자가 있고 한 쪽에는 지붕이 있는 바에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이 서있는 구조다. 남성 출연자들이 정치를 논하는 동안 여성은 혼자 부엌으로 꾸며진 공간에 떨어져서 남성들의 말을 듣고 있다. 여자의 자리는 거기, 이 쪽으로 넘어오지 말라, 고 작정하고 보여주는 듯 하다.


작년 여름 문재인 대통령과 재계 총수가 만났던 ‘맥주 회동’을 담은 사진 한 장은 결코 사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 사진을 보면 마치 ‘최후의 만찬’처럼 남성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늘어서있다. (우연이겠지만 사진 속에는 13명이 찍혔다) 모두 손에 맥주 잔을 들고 흰 셔츠를 입은 그들의 단체사진을 바라보며 ‘경제’의 얼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통령, 비서실장,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러 기업인들이었다. 잘 사는 경제를 만들자며 모인 그 자리가 모두 남성들로 채워져 있는 이 풍경이 지극히 우연이기만 할까.


여성주의 정치이론가 아이리스 매리온 영은 노동시장에서 관찰되는 억압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별한다. 착취, 주변화, 무력화, 문화제국주의 그리고 폭력이다. 여기서 문화제국주의는 “특정 그룹의 경험과 관점을 고정관념으로 삼음으로써 이것을 ‘타자’로 구성하고 동시에 규범으로 인정된 주류 집단의 경험과 문화를 보편화함으로써 ‘타자’를 배제하는, 이중적 배제의 형태다.”(린다 맥도웰, 『젠더, 정체성, 장소』 , 306쪽)


성별 공간 분리는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공공장소는 여성을 주체로 인식하지 않았다. 미디어는 이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거는커녕 오히려 관념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여성 친화적인 공간은 주로 소비의 공간이다. 19세기에 파리에 처음 백화점이 생길 때부터 거대한 소비의 장소는 여성의 입장에 관대했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소비자로 자리매김했다. 남성 가장-임금 노동자, 여성 보조자-소비자의 구도를 만들어 여성이 남성에 의존해 살면서 돈을 쓰는 이미지를 만든다. 여성에게 ‘관대한’ 노동의 자리가 바로 접대하는 역할이거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이다. 이 역할 분리는 여성의 자리를 게토화한다. 전통적으로 외교관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지만 외교관의 아내들은 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비공식적 외교를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여성을 투명하게 만든다.


목소리를 내는 방식에는 ‘어디에서’ 말하는가도 중요하다. 자리가 정해진 사람들은 자리의 이동이 그 자체로 사회의 규범에 저항하는 방식이 된다. “페미니스트 비평가 엘스베스 프로빈(Elsbeth Probyn)이 주장한 바와 같이 장소의 정치는 “우리가 어디에서 말하고 어떤 목소리들이 허락되는가”에 달려 있다” (린다 맥도웰, 『젠더, 정체성, 장소』  , 373쪽)


이처럼 권력의 역사는 장소-자리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느 자리에서 여성이 어떻게 보이는가, 이 문제가 사소하지 않은 이유다. 정해진 자리 바깥으로 나가고, 정해진 역할을 벗어나 경계를 무너뜨리고 질서를 교란시킬 때 타자와 주체의 권력 관계는 전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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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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