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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같았던 순간

카를로스 클라이버, 베토벤 : 교향곡 5번, 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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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클래식을 전공했더라면, 아마도 평생 베토벤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2018. 03. 16)

출처 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얼마 전,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넋두리를 하는 동생에게 매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 소중한 순간들을 왜 밀어내려 하냐며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나이가 들 수록(?) 찰나의 한 자락마저 더욱 아끼고 아끼게 되는 내 마음과는 달리, 너무 무심하게, 그리고 빠르게 곁을 스쳐 가는 시간이 아쉬워서였을까.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말에 괜히 더 감정이입이 되어 덜컥 흥분을 하고야 말았다. 학교에 임용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매 학기마다, 매 수업시간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 정신없이 마음을 쏟은 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학생들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 그렇게 맞이한 방학은 또 왜 그리도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사실 이번 겨울은 “방학”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논문 작업. 클래식과 재즈의 음악적/학문적/심미적 연관성을 폭넓게 다루어보고자 시작한 연구였는데,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다양한 클래식 음반을 접했던 시간이자 클래식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한층 더 깊어진 시간이기도 했다. 연구 도중 마음을 사로잡은 음반 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이 수록된 음반이다.

 

고전과 낭만, 인상주의 시대에 걸친 여러 작곡가의 음반을 들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신선함을 주었던 작곡가가 베토벤이었다. 아마도 고전주의 시대의 형식적이고 절제된 매력과 낭만파 시대의 자유분방하고 극적인 매력을 동시에 살려서 담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작곡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 고전악파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지만 동시에 낭만파 시대의 문을 연 작곡가라고 평가될 만큼 그의 작품들은 그 당시로써는 기존의 틀을 깨는 혁신적인 음악이었으며, 시대적으로도 낭만주의와 상당 부분 겹쳐있다. 실제로 베토벤의 곡과 하이든, 모차르트의 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은 예측이 가능한 정석과 같은, 궁정에서 연주될 법한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느낌의 음악이라면 베토벤의 음악은 예측이 불가한,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궁정을 휘젓고 다니는 말괄량이 혹은 돌연변이 같은 음악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교향곡들은 1악장이 가장 진지하고 무거운 반면, 마지막 악장인 4악장은 화려하고,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것이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깔끔한 결말 덕에 곡이 끝날 즈음엔 잘 짜인 해피엔딩 영화를 본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조금 다르다. 1악장부터 마치 돌진하듯이 시작된 곡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고조되어, 마지막 악장을 들을 때쯤엔 심장이 터질듯한 절정을 선사한다. 오히려 처음보다 마지막이 더 장엄하고, 곡이 끝나고 나면 편안함보다는 먹먹함, 심지어는 절정 뒤 찾아오는 공허함마저 느끼게 된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5번과 9번은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닫으며 마지막을 향해가는 대표적인 두 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이 음반에 실려있는 5번 교향곡은 “운명 교향곡”이라는 표제로 더 유명하다. 어쩌면 베토벤 교향곡 5번과 운명 교향곡이 뭔지는 몰라도, 1악장의 “빰빰빰 빰-“의 네 음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베토벤은 이 네 음표가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1악장뿐만 아니라 전 악장에서 이 소절이 변형,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소절이 각 악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찾아가며 듣는 것도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작곡을 하는 나로서는 어떻게 이 네 음표가 이토록 힘있고 완벽한 악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짧고 강력한 운명의 소리에서 화수분처럼 쏟아져나오는 그의 음악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특히 마지막 악장의 피날레는 트롬본과 피콜로가 더해져 찬란함의 끝을 들려주었는데,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반짝이는 불꽃축제를 감상한 기분이었다. 사실 낭만파 작곡가들의 곡은 그들의 상상력이나 낭만성, 서정성을 더욱 우선순위에 있어 때로 형식에서 벗어나거나 걷잡을 수 없는 공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에 비해 베토벤의 곡은 너무나 풍부한 감정선과 선율, 상상력 속에서도 형식의 미마저 갖추는 완벽한 곡이었다.

 

베토벤 5번 교향곡은 논문을 쓰며 다시 보게 된 클래식 곡 중 단연 1위였다. 다른 곡도 얼른 들어야 하는데, 한참 동안이나 베토벤 5번 교향곡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만약 클래식을 전공했더라면, 아마도 평생 베토벤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행복한 꿈을 꾸며 겨우 겨우 다른 작곡가의 곡들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음반을 추천하는 이유는 지휘자의 개성, 그리고 희소성 때문이다. 음반을 들어보면 베토벤 교향곡 음반들 중 명반이라고 꼽히는 푸르트 뱅글러나 카라얀의 해석과는 확실히 다른 그만의 매력이 돋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곡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고전주의 시대에 혁신을 일으켰던, 급진적이었던 인물인 베토벤의 성향을 잘 담아낸 연주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클라이버는 위대했던 명성에 비해 너무 적은 음반을 남긴 지휘자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희소성 역시 클라이버의 음반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세기를 휘어잡았던 지휘자가 남긴 몇 안되는 음악을, 그것도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만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내게도 운명 같았던 순간이었다. 무척이나 정신 없고 바빴던 이번 겨울 방학 동안 가장 여유로웠던 시간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봄날, “운명”을 찾고 있다면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Carlos Kleiber 베토벤 : 교향곡 5번 `운명`, 7번 Ludwig van Beethoven 작곡/Carlos Kleiber 지휘/Wiener Philharmoniker 오케스트라 | Universal / Deutsche Grammophon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명연이자 베토벤 교향곡 5번, 6번의 명반으로 꼽히는 연주가 담긴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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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한(피아니스트, 작곡가)

피아니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美버클리음악대학 영화음악작곡학 학사.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 박사. 現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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