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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제식훈련을 했다, 왜일까?

제식훈련의 ‘심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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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교련복’을 입었던 세대라면 군대 사열 못지않게 엄격했던 월요일의 열병식을 기억할 것이다. 밴드부의 행진곡에 맞춰 걷다가 일제히 ‘교장 선생님께 경례’를 했다. 고등학생들에게 그러한 제식훈련을 가르칠 생각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2018. 03. 09)

오늘날 전투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제식훈련(制式訓鍊)’의 기원

 

군복무 시절, 나는 보병 말단 소총수였다. 시종일관 뛰고 달리는 훈련을 받았다. 3보 이상은 차를 탄다는 포병을 몹시 부러워했다. 그래도 마지막 고지에 태극기를 꽂는 것은 보병이라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사단에 속한 각 연대가 돌아가면서 몇 달씩 철책 근무를 섰다. 후방으로 빠지면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없을 때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아침부터 나가 ‘작업’을 했다. 주로 군사 도로를 새로 닦거나 보수하는 일이 전부였다. 할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 했다. 구덩이를 파고, 다시 덮는 수준의 작업이 계속됐다. 한가하면 딴 생각하다가 사고 친다는 이유였다. 작업을 오가는 길도 일종의 ‘제식훈련’이었다. 열 맞춰 절도 있게 걸어야 했다. 군가도 열심히 불렀다. 식당에 갈 때도 줄맞춰 군가를 부르며 걸었다.

 

군인이 받는 가장 기초적인 군사 교육은 제식훈련이다. 병사들이 열과 종을 반듯이 하여 발 맞춰 행군하고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와 같은 절도 있는 동작을 반복한다. 사실 오늘날 전쟁에서 제식훈련의 전술적 가치는 거의 없다.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각종 포탄과 기관총이 오가는 전장에서 집단으로 줄 맞춰 씩씩하게 걷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바로 전멸이다. 그래도 오늘날 세계의 모든 군대는 모두 제식훈련을 받는다. 소위 ‘군인정신’이라 불리는 규율과 단결의 집단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식훈련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제식훈련은 한때 아주 강력한 무기 운용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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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식훈련(military drill)’. 일본어로는 ‘기본교련'으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전투에서 이렇게 뭉쳐 다니면 그대로 몰살당한다. 그런데도 제식훈련은 계속되고 있다. 왜 그럴까?

 

 

군대의 제식훈련은 16세기 말 네덜란드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전투 대형이었던 ‘팔랑크스(Phalanx)’와 로마의 ‘레기온(Legion)’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긴 창과 커다란 방패를 든 군사들이 밀집된 대형으로 진군하는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이후 로마군은 레기온이라는 보다 진화된 밀집 대형을 개발한다. 보병의 대형 단위가 3단으로 구성된 레기온은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강력한 전투대형이었다. 팔랑크스나 레기온 같은 전투대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다.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전투대형이 흐트러지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그리스, 로마 군대의 전투대형이 다시 나타난 것은 개인 화기로서 소총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다. 소총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4~15세기부터다. ‘화승총’이라고도 불리는 ‘아쿼버스(arquebus)’라는 원시적 형태의 소총이 칼이나 창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다. 화승(火繩), 즉 도화선을 이용해 탄약을 점화시키는 방식의 총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鳥銃)’도 이 아쿼버스의 일종이다. 아쿼버스와 같은 화승총은 석궁이나 활에 비해 간단한 훈련으로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화살이나 창에 비해 살상력도 훨씬 뛰어났다. 15세기 말이 되면서부터 아쿼버스는 더욱 강력한 화력의 ‘머스킷(Musket)’으로 바뀐다. 머스킷은 아쿼버스보다 긴 총신을 가졌기 때문에 사거리도 훨씬 더 길었고 방향도 정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스킷의 중량도 가벼워졌고, 총신 끝에는 대검을 꽂아 근접전에서 칼이나 창을 대신하게 되었다.

 

머스킷도 아쿼버스처럼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하는 전장식이었고, 화승식 발사 장치를 사용했다. 그러나 화승식 발사 장치는 너무 복잡했다. 우선 총을 세우고 ‘꽂을대’를 사용해 총구에 화약, 뭉치, 총알 등을 다져 넣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총을 지면과 평평하게 들고, 또 다른 화약을 약실에 넣은 후, 불이 붙은 화승을 격발 장치에 댄다. 이제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문제는 이 여러 가지 발사 순서 가운데 하나라도 틀리거나 건너뛰면 총은 발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도 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엄청난 속도의 총알은 어떠한 갑옷도 관통할 수 있었고, 단 한 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하던 네덜란드의 장군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 1567~1625)는 화력은 뛰어나지만, 절차가 복잡하기 그지없는 이 비효율적인 개인 화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해결책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투대형을 끌어왔다. 병사들은 일정한 형태의 대형을 유지하면서 제일 앞쪽 줄의 병사들이 머스킷을 발사한다. 총을 발사한 병사들이 대형의 맨 뒤로 돌아가 다시 장전하는 사이, 그 다음 줄의 병사들이 총을 발사한다. 이렇게 하면 총은 연속적으로 발사되면서, 각 개인이 제각기 장전하고 발사하는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화력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발사 방식은 매우 잘 훈련된 병사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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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드 게인(Jacob de Gheyn)의 책 『무기동작』의 표지.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42개의 머스킷 소총 발사 동작에 관한 책이다. 바로 이 자세한 발사 동작 훈련이 오늘날 ‘제식훈련’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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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동작』에 포함된 42개의 머스킷 소총 발사 동작 가운데 하나. 네덜란드의 마우리치는 각 동작에 간단한 구호를 붙여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훈련했다.

 

 

마우리츠는 머스킷 발사 동작을 42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동작에 간단한 구호를 붙였다. 또한 병사들이 구호에 맞춰 각 단계를 일사불란하게 수행하도록 훈련시켰다. 단순히 총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발을 맞춰 행군하고, 대열을 유지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바로 이 마우리츠의 세밀한 훈련 방법이 오늘날 제식훈련의 기원이다.


제식훈련의 전술적 가치는 후장식 총이 나오면서부터 사라진다. 후장식 총은 앉아서, 혹은 엎드려서 사격할 수 있다. 병사들은 더 이상 대열을 맞춰 총을 발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전장식 머스킷과 비교해 후장식 노리쇠 장전 라이플의 압도적 위력이 발휘된 곳은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의 쾨니히그래츠 전투다. (다음 연재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식훈련은 ‘심리적 가치’ 때문에 여전히 기초 군사훈련의 필수과정이 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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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 시내 고등학교의 교련 장면. 고등학생들에게 이 같은 군대식 제식훈련을 시킬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그러나 당시 우리는 이 훈련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16세기 말의 이 마우리츠 제식훈련이 도대체 어떻게 대한민국 군대까지 전해졌을까? 군대뿐만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을 입었던 세대라면 군대 사열 못지않게 엄격했던 월요일의 열병식을 기억할 것이다. 밴드부의 행진곡에 맞춰 걷다가 일제히 ‘교장 선생님께 경례’를 했다. 고등학생들에게 그러한 제식훈련을 가르칠 생각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또 우리는 그 훈련을 어떻게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 교련복을 입고 절도 있게 행군하던 그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이제 한국 사회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그 제식훈련의 영향은 전혀 없는 걸까? (제식훈련을 일본에서는 ‘기본교련’이라 했다. 영어로는 ‘military  drill’이다.)

 

 

일본 군대가 그토록 잔인하고 포악했던 이유

 

1884년 8월, 독일 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오야마 육군경 일행은 독일 제국 군대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참관한다. 독일 제국 군대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군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보병과 포병, 그리고 공병과 병참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독일 제국 군대의 야전 훈련은 근대 군대의 총제적 전략, 전술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프랑스 군대 체재에 익숙했던 오야마 일행은 왜 야마가타가 독일 제국 군대에 경도되었는가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었다.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독일 병사들의 절도 있는 태도 또한 일본의 참관단에겐 놀라운 충격이었다. 오야마는 몰트케 참모총장에게 신설된 육군대학교의 교관으로 유능한 독일 장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다. 몰트케야말로 독일 제국을 실제로 가능케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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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전승 기념탑(일명 ‘천사탑’)에서 내려다 본 독일 제국 성립의 영웅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몰트케(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룬(Albrecht von Roon)의 동상. 가운데가 비스마르크, 오른쪽 흰색 동상이 몰트케, 왼쪽이 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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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비스마르크, 룬, 그리고 몰트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은 물론 비스마르크의 작품이다. 그러나 참모총장 몰트케의 작전이 없었다면 독일 제국의 성립은 불가능했다. 1871년, 독일 제국 성립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로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 몰트케(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1800~1891)와 더불어 알브레히트 폰 룬(Albrecht von Roon, 1803~1879)이 있다. 룬은 몰트케와 더불어 프로이센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통일 전쟁의 당시에는 전쟁 장관을 맡고 있었다. 이 세 명을 기리는 동상이 베를린 전승 기념탑 옆에 세워져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당시에는 ‘군대를 가진 국가들이 있는 반면, 국가를 가진 군대도 있다’는 농담이 돌았다. 물론 프로이센을 가리키는 이야기였다.

 

프로이센의 작전참모본부는 통일된 독일 제국에서도 의회나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렸다. 앞서 설명한 일본 군대의 ‘통수권’ 독립은 바로 이 같은 독일 제국의 작전참모본부 사례를 흉내 낸 것이다. 독일 제국 군대의 통수권 독립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지속된다. 독일 제국 형성기에 활약한 비스마르크, 룬, 몰트케에 비견될 만한 세 명의 인물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도 있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 1865~1937), 그리고 또 다른 몰트케(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 1848~1916)다. 이 몰트케는 프로이센의 몰트케의 조카다. 그러나 이들의 명성은 앞선 인물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오히려 악명에 가깝다. 이들의 패배는 독일 작전참모부의 패배를 뜻했다. 독일 군대의 통수권 독립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함께 끝난다. 반면 일본 군대의 통수권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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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멘스 야콥 멕켈((Klemens Wilhelm Jakob Meckel) 소좌. 1884년 8월, 독일 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오야마 육군경은 몰트케 참모총장에게 새로 설립한 일본 육군대학교의 교관 파견을 요청한다. 몰트케는 자신의 부하 멕켈 소좌를 일본에 파견한다. 멕켈은 독일 제국 참모제도를 일본 군대에 그대로 전수한다. 그러나 참모제도의 핵심인 군수, 병참, 보급은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 바로 이 때문에 일본 군대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군대가 된다. 병참과 보급을 약탈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몰트케는 자신의 참모인 클레멘스 야콥 멕켈 소좌(Klemens Wilhelm Jakob Meckel, 1942~1906)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멕켈은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일본 육군대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일본의 육군대학교는 1882년에 개교했지만 멕켈이 올 때까지 장교를 위한 특별 교육 과정으로서의 커리큘럼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멕켈은 제식훈련의 구령 붙이는 방법부터 교육했다. 장교들이 참모로서 숙지해야 할 기본적인 군사학 지식도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뿐만 아니다. 군사 전략 단위를 ‘사단(師團)’으로 하도록 제의하여, 일본 육군의 근본 체제를 독일 제국 군대와 유사하게 만들었다. 일본 군대의 체계화에 멕켈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멕켈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일단, 일본군 장교와 독일 제국 군대의 장교 사이에는 장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에 있어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독일의 장교들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양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가장 공들인 분야가 ‘교양(Bildung)’이었다. 이때 교양이란 단순히 품위 있는 태도나 고상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 민족에 어울리는 수준 높은 인문학적 지식을 뜻한다. 이 교양(Bildung)과 연결되어 강조된 단어가 전문적인 직업 교육을 뜻하는 ‘교육(Ausbildung)’이다. 독일 제국 군대의 장교는 이 같이 수준 높은 교양 교육을 받은 후 군사 교육을 받았다. 일본 군대의 장교는 전혀 달랐다. 정치나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한 그 어떤 식견도 없었다. 그저 전쟁에 필요한 교육만을 받았을 뿐이다. 인간을 존중하는 그 어떤 문명적 토대 없이 그저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만을 익힌 일본군 장교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는 그 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인근 아시아 국가들이 뼈저리게 겪었다.

 

일본 군대가 그토록 무자비했던 근본 원인이 또 하나 있다. 일본군 장교들의 소양 부족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다. 군수, 병참, 보급에 관한 무지였다. 독일 참모 제도의 우수성은 거기에 있었다. 실제 전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 조건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관리하는 총체적 관리가 참모장교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신설된 일본의 육군대학교에 군수병과는 없었다. 일본군은 군수참모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참모부에는 군수 담당 부서도 아예 없었다. 전통적으로 일본 군대는 군수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구조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군수품은 약탈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탈로 식량 및 보급품을 해결하는 것이 당연했다.

 

근대적 형태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원시적 군대 운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랬다. 일본 군대, 특히 일본 육군의 만행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독일서 파견된 멕켈 또한 이 부분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장교로서의 기본 실무를 가르치기에도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군대는 이렇게 출발부터 자멸의 요소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대학교 출신 장교는 승승장구했다. 졸업 후 10년을 버티면 대좌(대령)은 자동적으로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군인으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육군대학을 나와야 했다. 졸업 성적도 대좌가 될 때까지 모든 인사에 반영되었다. 졸업식 때 성적이 우수한 장교들에게는 천황이 직접 ‘군도(軍刀)’를 하사했다. 신(神)이라 여기는 천황에게 직접 군도를 받는 것은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장군이 되면 대통령이 ‘삼정검(三精劍)’을 전달한다. 조선시대 때, 왕이 무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검을 하사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삼정검을 장군 신고식에 하사하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부터의 일이다. 정황상 일본 육군대학교와의 관련성이 의심되는 부분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에게는 외국 유학의 특전도 있었다.

 

육군대학교 1기 졸업생은 열 명에 불과했다. 수석 졸업생은 도조 히데노리(1855~1913)였다. 그는 수석 졸업자답게 뛰어난 인재였다. 졸업 후, 독일 유학을 거쳐 독일군 전략전술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 1780~1831)의 『전쟁론(Vom Kriege)』 을 연구하여 일본군 전략전술의 기초를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이후 경력을 살펴보면 육군대학교 1기 수석 졸업자로서는 그리 화려하지 않다. 장군이 되어서도 일본체육회체조연습소의 소장을 맡았을 뿐이다. 이유는 그가 난부번(南部審)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사쓰만번과 조슈번 출신이 아니면 제아무리 육군대학교 출신의 우수한 인재라고 해도 설 자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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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일본 군국주의의 원흉이다. 그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는 육군대학교 1기 수석 졸업생이었다. 그러나 도조 히데노리는 그리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군 생활을 마감한다.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도조 히데키는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들이라면 치를 떨며 괴롭혔다.

 

 

도조 히데노리의 아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었다.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스위스와 독일에 무관으로 근무했다. 1936년 일부 청년장교들이 ‘2.26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후 그가 태평양전쟁의 주범이 된다. 도조 히데키는 권력을 잡은 후,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이라면 치를 떨며 탄압했다. 바로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변변치 못한 군인으로 삶을 마감했던 아버지의 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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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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