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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쓸데없음에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들인데 쓸데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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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시간과 체력을 소모해가며 창작하는 이유가 뭐겠어? 형식미를 추구하는 거야. 쓸데없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행태야말로 인간다운 특성이지. (2017.09.29)

 

이기준-10월호.jpg

 

노바는 근 몇년을 통틀어 가장 바쁜 한 달을 보냈다. 그 와중에 가을 준비까지 차곡차곡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바가 가을을 그윽이 타는 성향이라 그 대비책을 세우더라는 말이 아니다. 열과 성을 다해 옷을 샀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해외 배송 박스가 도착했다. 내 눈엔 적잖이 신기했다. 주말 없이 매일 새벽 5시에 출근할 정도로 바빴으면서도 규칙적으로 시간을 쪼개어 쓸데없이 옷 탐색에 시간을 할애하다니. 입을 옷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노바는 빨래 한 번 하지 않고도 한 철을 날 정도로 옷 부자다.

 

하긴 빤한 형태(인간이 획기적으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 의복의 기본형은 변함 없을 터) 안에서 무한히 변주되는 디테일은 내가 보기에도 흥미진진하다. 짙은 초록색 코듀로이 바지(“착 가라앉으면서 선명한 색 좀 봐.”), 탁한 분홍색 코듀로이 바지(“품이 낙낙한 더플코트와 실루엣이 절묘하게 이어질 것 같아.”), 기운 장식이 요란하고 통이 넓은 청바지(“허리 선이 높아서 벨트 고리를 내려 달면 색다르게 입을 수 있겠어.”), 앞섶에서 칼라로 이어지는 방식이 독특한 뒤집어 쓰는 셔츠(“감촉과 핏이 완벽해! 다른 색도 사야지.”), 면(“울이 아니라”) 소재 터틀넥 니트 등 아직 찬바람도 불지 않았건만 또 한 철 능히 날 만큼 샀다.

 

“넌 쓸데없이 무슨 돈을 그렇게 쓰냐.”

 

노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쓸데없이? 인간이 만든 쓸 만한 것들은 다 쓸데없는 일인데? 책, 영화, 음악, 미식, 패션 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문화란 그런 거야.”

 

이번엔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들인데 쓸데없다니!”

 

“넌 디자이너라는 놈이 그런 소릴 하냐.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남는 시간이 생기자 놀이 따위의 ‘쓸데없는’ 짓을 하게 됐고, 역사와 더불어 축적된 ‘쓸데없는’ 산물이 문화 아니겠어. 이를테면 네가 좋아하는 책. 내용 자체만 중요하다면 표지 디자인이 왜 필요해? 콘셉트, 타이포그래피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내용 자체만 중요하다면 수백 수천 명이 큰 노고와 돈을 들여가며 영화를 만들 필요 있어? 관객이 이토록 많아지지도 않았겠지. 작가가 시간과 체력을 소모해가며 창작하는 이유가 뭐겠어? 형식미를 추구하는 거야. 쓸데없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행태야말로 인간다운 특성이지.”

 

노바가 웅변을 마치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 인류는 지구에 해롭다는 판정을 받아 싹쓸이될 운명에 처한다. 인류를 멸하러 지구에 온 외계 존재가 임무 수행 중 우연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걸 만들 줄 아는 종이라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볼까, 하고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영화는 별 볼 일 없었지만 딱 그 발상만큼은 좋았다. 그런데 음악의 효용은? 노바의 말처럼, 음의 고저장단으로 일군 형식미를 즐기는 것 말고 어떤 실용적인 면이 있는지 모르겠다. 노바는 이어 말했다.

 

“왜 쓸데없이 이렇게 옷을 사냐고? 넌 옷을 왜 사냐? 여름엔 땀 때문에 매일 한 벌씩 입어야 한다 치고. 겨울 코트는 실용적으로만 따졌을 때 한 벌이면 충분하지만 너 역시 방풍 코트 한 벌, 다운 파카 한 벌, 더플코트 한 벌 있잖아. 왜 세 벌씩이나 필요해? 가끔 다운 조끼까지 활용하던데, 다른 형식미가 필요해서 그러는 거 아냐?”

 

반박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형식미 추구는 본능일까? 형식을 겉치레라 절하하는 사람 역시 형식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취하는 셈이다. 나의 ‘어느 정도’와 노바의 ‘어느 정도’ 사이의 격차는 어느 정도일까? 논점을 살짝 바꿔 보았다.

 

“사람이 쓸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고 쳤을 때 작업에 얼만큼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해?”


“옷에 신경 쓸 시간에 작업의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높이라는 소리 하려고?”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

 

“대충 작업할 생각이었으면 뭐 하러 새벽에 출근하겠냐. 반대로 내가 물어보자.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오직 자기 직무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직인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매무새도 관리하면 안 되나?”

 

토마스 만은 매일 아침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서재로 출근해 글을 썼다고 한다.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에서 무라카미 류는 셔츠의 매력에 빠져 한 번에 스무 장씩 쇼핑을 하는가 하면 매일 아침 옷장을 열고 셔츠와 넥타이를 매칭하고는 눈으로만 즐긴 후 편한 복장으로 일한다고 썼다. 『서재 결혼 시키기』에는 지극한 ‘쓸데없음’을 매력적으로 그린 일화가 나온다. 19세기 영국의 해군 제독이자 탐험가였던 존 프랭클린 경이 북극 캐나다 지역에서 부하들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나온 짐은 “모노그램이 박힌 은식기, 주사위 놀이판, 시가 상자, 옷솔, 단추 광택제, 『웨이크필드의 목사』” 등이었다고 한다. 생존에 필요한 도구 대신 ‘쓸데없는’ 물건을 최후의 순간까지 챙겼던 것이다. 저자인 앤 패디먼의 말마따나 ‘유능한’ 리더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엔 여러 가지 미덕이 있다.

 

쉽게 설득당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 반박할 증거를 찾다 셜록 홈스를 떠올렸다.

 

“셜록 홈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일에만 몰두했대. 사건 해결에 도움되지 않는 정보에 뇌 용량을 낭비할 수 없다는 거지. 그 정도는 돼야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셜록 홈스는 또한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설정은? 책에서는 홈스가 바이올린 연주가 생각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펼치지만 코넌 도일은 그런 엉뚱하고 ‘쓸데없는’ 치우침이 매력으로 작용하리라 판단한 게 아닐까?”

 

한 후배 디자이너는 일본의 디자인 회사에 출근한 첫날 물 묻은 손을 허공에 털자 ‘자신의 주변조차 돌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돌볼 자격이 없다’며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반듯하게 다림질한 손수건은 필수품이 되었고 매일 퇴근하기 전 책상을 정리정돈하는 습관이 붙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생각이나 말도 더 논리적으로 하게 된 것 같다고. 태도를 얻기 위해 먼저 형식을 갖추는 일도 해 볼 만한 일이겠다.

 

“그런데 옷은 그냥 사고 싶어서 사는 거지?”

 

“당연하지.”

 

노바는 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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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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