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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

이 제목 진짜 내가 먼저 지었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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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달리 ‘여자친구’라는 단어를 예뻐하는데 그 단어가 풍기는 사랑스러움과 귀여움과 애틋함을 정말이지 좋아하기 때문이다. (2017.09.06)

 

김서령의 우주서재 - 복사본.jpg

       PHOTO BY Roman Drits on Barnimages

 

여사친, 남사친 하는 따위의 말을 들으면 귀가 근질근질하다. 여자친구, 남자친구라는 예쁘장한 단어가 있고 굳이 이성적 탐닉 같은 것 없이 맹숭한 사이라면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친구라고 긴 수식어를 붙인다거나 남자친구‘이긴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냐’라고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유달리 줄임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을 테다. 게다가 나는 트렌드에도 눈이 어두워 이삼년 전까지는 ‘미드’와 ‘일드’도 몰랐다. 말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의 직무유기라고 친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나는 유달리 ‘여자친구’라는 단어를 예뻐하는데 그 단어가 풍기는 사랑스러움과 귀여움과 애틋함을 정말이지 좋아하기 때문이다. 긴 벤치에 앉아 차가운 커피 한 잔 물고 마냥 웃어주는 친절한 동행 같은 것이 떠오르고 휴대전화가 뜨거워지도록 밤새 수다를 떨어도 하나도 지겹지 않은 밤 같은 것이 떠오른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영어발음을 들켜도 창피할 것 없고 무언가 슬프고 허전한 일이 있어 계란찜 뚝배기 앞에 두고 매운 닭발을 줄줄 빨고 있어도 그냥 묵묵히 맞은편에 앉아 있어줄 것만 같은 여자친구, 그런 존재.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만났던 한 남자는 지인들 앞에 나를 보이며 “제 여친이에요” 말을 했고 나는 그 소개법이 하도 신선해 친구들에게 종알종알 일러바쳤다. 여자친구도 아니고 여친이라 불렀다며 말이다. 친구들은 일제히 나를 비웃었다. “그러니까 마흔 넘어 ‘여친’이란 말에 홀랑 넘어갔단 말이지?” “넘어갔단 말이 아니고 신선했다니까……” “취향 참 희한해, 남들 다 쓰는 여친이란 단어가 뭐가 어떻다고.” “실제 대화에서 여친이란 말을 쓰는 남자가 진짜 있는 줄 몰랐다니까.” “네가 그동안 이상한 남자들만 만났던 거야.” “그게 아니라……” “가만 보면 얘, 일관성도 없지 않니? 여사친은 싫으면서 여친은 좋다는 게 말이 돼?” “좋다고 한 건 아니야!” 이응준의 소설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도 제목이 슬퍼 읽을 엄두를 못 냈던 나로서는 도무지 친구들의 비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를 ‘여친’이라 소개했던 그 남자와 나는 결혼까지 했다. 굉장히 트렌디하고 세련된 남자인 줄 알았지만 그건 다 나의 오해였다. 그도 내가 마냥 사랑스럽고 즐거운 ‘여친’이 아니라 늙고 지루하고 게으른 여자란 걸 드디어 알아채고선 코가 빠졌겠지만 말이다.

 

내가 아는 소설들 중 가장 예쁜 제목을 가진 건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다. 윤영수의 단편집이다. (아마도 이 제목을 듣고 입가에 배시시 웃음을 띠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라 본다) 미련이 많은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도 담백한 소설이 있고 전쟁을 그리면서도 조용한 소설이 있고 사랑스러운 제목을 쓰면서도 끔찍한 소설이 있는 법이지만,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제목 그대로 귀엽다. 귀여운 소설이다. 짠하고 모질고 눈물 나고 허랑한 인생살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귀여운 여자친구가 있고, 그녀를 바라보는 귀여운 남자친구가 있다. 그녀의 연애가 귀엽고 그녀의 연애를 바라보는 그의 우정이 참말 귀엽다.

 

실은 요즘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연애에 관한 소설을 쓰는 중이다. 아니, 어찌어찌한 사연으로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의 긴 기다림에 대한 소설을 쓴다고 해야겠다. 원고지 1000매 정도를 쓸 예정인데 300매가 훌쩍 지나가도록 주인공 두 사람이 헤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후딱 헤어져줘야 그 사연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고 기다림이 시작될 텐데, 여전히 내 주인공들은 알콩달콩 연애만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두 사람의 연애에 혼자 즐거워하고 있는 거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까르르 웃어젖히고 별 것도 아닌 일에 토라지고 그러고서도 대수롭잖게 마음을 푸는, 시시한 연애에 빠져 있는 거다. 참 큰일이다. 바지런하게 써내려갈 생각은 않고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를 다시 꺼내 읽고선 ‘아, 이 제목 진짜 내가 먼저 지었어야 하는 건데’ 아쉬워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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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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