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희 “모든 익숙한 것에 거리를 갖는 일”
신주희 작가의 서재
철학서나 에세이들은 전나무가 빽빽한 오솔길이었고, 소설이나 역사서 같은 책은 사나운 파도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어디였죠. 저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책 속을 걸었어요. (2017.08.23)
책의 재미를 느낀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비행기가 이륙하는 짧은 순간, 실감해요. 지상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고 있구나, 하고. 여행에 대한 기대보다는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고 있다는 묘한 안도감이 좋았습니다. 언젠가 책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과 비슷한 기분이 된 적이 있어요.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도 중요한 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초조한 오후였을 거예요. 애인과 이별한 밤이었을 것이고,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 무기력한 새벽이었을 거예요. 무엇인가 참을 수 없고, 안달복달했던 어느 날, 무심코 책을 폈습니다. 그러고는 곧 고민스러운 시간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걷기 시작했어요. 철학서나 에세이들은 전나무가 빽빽한 오솔길이었고, 소설이나 역사서 같은 책은 사나운 파도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어디였죠. 저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책 속을 걸었어요. 걸으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파괴하려 했던 미련한 계획들을 조금씩 수정해갔습니다. 책이 신기했습니다. 시간들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그 힘에 놀랐습니다. 되돌아보니, 책이 가장 강력하게 제 매력을 발휘했던 순간은 내 인생에 비바람이 부는 순간 순간이었죠.
독서는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독서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 그렇다고 배워온 것, 배워서 잊어버릴 수 없는 것들을 확인하는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진지한 독서는 불변의 가치라고 여겼던 것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트는 여유를 갖는 거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분히 만끽하기 위해 모험과 같은 독서를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에 대한 책은 좀 심심한 여행에 속하죠. 현미경처럼 미세하게, 혹은 망원경처럼 먼 시선으로 관심 분야를 접근해보면 어떨까요? 여기에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책을 접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어요. 책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불편하고 가장 난해한 경험을 해보시기를. 저는 확신해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익숙한 것에 거리를 갖는 일이라는 걸요. 그리하여 규정되어진 모든 잣대로부터 아는 만큼 자유로워지는 거죠.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거창하게 말해서 나는 예술의 카테고리 안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절벽에 세워두고 작업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술이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죠.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벼운 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 빈 손으로 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보는 것. 아무것에도 억매이지 않고 무너져보는 것. 그게 소설이든, 예술이든. 뭐든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묶은 소설집이 가을에 나옵니다. 제목은 『모서리의 탄생』이에요. 예술이 탄생하는 어떤 지점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이 담긴 제목이죠.
이런 관심사와 관련하여 여러 책을 읽었지만, 최근의 것을 꼽자면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예요. 지금의 저보다 7년을 더 살다간 페소아는 사후에 이름을 알려 지금은 포르투갈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힙니다. 모호하고 낯선 그의 단상들을 읽으며 나는 다름아닌 오늘날 예술가들의 불안한 내면을 생생하게 들여다 본 기분이 됐습니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나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미지의 산에서 미지의 계곡으로 내려왔다.” 『불안의 서』 205쪽
예술가의 숙명같은 것, 통제 불가능한 강박같은 것, 분열과 꿈 같은 것을 손끝으로 더듬는 것 같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던 책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책을 경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책이 좋고 어떤 책이 나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과 연결해서 어떤 경험이 가능한가, 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가능하다면 꼭 그렇게 해 보시라고요.
명사의 추천
적절한 균형
로힌턴 미스트리 저 / 손석주 역 | 아시아
서사란 어떠해야 할까, 그 서사 속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 를 고민할 때 추천받았던 책이다. 인간이 궁금해지고 인간에 대해 처절하게 되물을 수 있었다. 아직도 질문으로 남아있는 인도라는 나라와 그 안에 사는 인간군상들의 사실적인 묘사, 이상하고 아름다운 인물들이 900쪽이나 되는 두께를 이루고 있지만 이야기는 그 두께가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읽힌다. 그러면서 동시에, 뒤를 다시 넘겨보며 그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되는 소설. 불가항력의 환경에 의해 무너지는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역으로 희망의 가치가 떠오르는, 내게는 소설의 A to Z 같은 책이었다.
여름 별장, 그 후
유디트 헤르만 저 / 박양규 역 | 민음사
순간 포착의 귀재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싶은 작가 유디트 헤르만. 그녀는 소통이 단절된 인물들과 그 때문에 어긋난 관계들, 그 관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증오의 양상들을 흥미로운 설정 속에서 잡아낸다. 건조하지만 여운이 오래가는 시적인 문장과 젊은 작가 특유의 신선함과 독특한 인물들. 모든 것이 좋았지만 그녀가 섬세한 손길로 잘라낸 인간의 단면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표제작인 단편 『여름 별장, 그 후』 도 멋지지만, 『소냐』의 강렬함도 꽤 오래 남는다.
잔혹함에 대하여
애덤 모턴 저 / 변진경 역 | 돌베개
세월호 사건을 거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진실'이라는 단어였다. 선과 악, 거짓과 진실, 이 상반된 개념들에 사뭇 뭔가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는 욕구가 일 때, 이 책을 만났다. '악에 평범성'을 이야기 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읽으면 조금 더 깊은 논의를 할 수 있는 책. 어떤 것을 정의 내리고 그렇게 믿는 것, 그 믿음을 누군가에게 강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달음과 동시에 무엇보다 진실에 접근하는 태도가 사실은 진실 그 자체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기도 했다.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저 |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은 우리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매끄러움', '좋아요' 등과는 반대로 불안과 상처, 불완전 성과 공존하는 아름다움의 필연을 역설한다. 어쩌면 저자의 설명과 논리를 정리하거나 요약 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칫 집중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요소가 가득한 책. 다 읽으면 작가의 문장과 문장이 '예술의 본질'을 증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장치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착각마저 든다. 특별히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 와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카피캡슐
핼. 스테빈스 저 / 송도익 역 | 서해문집
카피라이터 시절 선배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다. 광고의 창조적 기술 연마를 위해 펴낸 책이라고 소개 되어있는데, 정작 카피라이터 시절에는 잘 보지 않다가 오히려 회사를 나오고 난 뒤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다. 광고의 기본과 전략과 멋진 캠페인을 만드는 법, 이것을 전달하는 기술 등을 소개한 책이지만 광고가 아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읽으면 조금 더 새롭게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기개발서의 클래식 버전을 읽는 느낌이랄까. 뭔가 아이디어나 글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 펼쳐 보기를.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 문학과지성사
시를 아름답다고 통속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꼭 이성복의 시를 그 속에 넣고 싶다. 시는 이래서 시 이구나, 했던 시절, 그 때는 어렸고, 나는 이 시인의 말들이 마냥 멋졌다. 지금 펼쳐봐도 여전히. 시는 잘 모르는데 시가 읽고 싶다, 하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더 좋을 것 같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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