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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좋은 얼굴 노란 한국인 여행객이 있다

스페인, 빌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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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뭐 드실 건가요?” 웨이터의 입에서 나온 한국말을 듣고도 한참이나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 당황한 그 남자와 나는 웨이터 너머로 다른 테이블을 허둥지둥 둘러본다. (2017.08.08)

 

남녀,-여행사정-28-01@빌바오.jpg

누가 내 말을 알아들을 지 몰라.(소곤소곤)

 

내 안의 편견

 

한국인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우리가 시시껄렁한 말을 꺼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코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모두 내뱉어도 된다는 의미이다. ‘아이가 저렇게 예쁜데 아빠는 왜 얼굴에 짜증이 가득할까?’, ‘설마, 자기 개가 똥을 쌌는데 그냥 두고 가는 거야?’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귀여워하는 게 느껴져’ 등 불과 30cm 앞에서 일어난 상황과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 남자와 사담을 맘껏 누릴 수 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을 신념처럼 받드는 소심한 그 남자도 한국 여행객이 많은 파리나 바르셀로나보다 이곳이 편하다고 할 정도다.

 

오늘도 단골 식당에 들러 9.5유로가 선사하는 푸짐한 메누 델 디아 menu del dia ('오늘의 메뉴'라는 뜻의 스페인어. 전식, 본식, 후식, 와인을 포함해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는데 평일 1시에서 5시까지 먹을 수 있다.)를 먹으려던 참이다. 테이블에는 어제도 그제도 만났던 할아버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식사 중이다. “할아버지도 우리처럼 이곳에서만 점심을 먹나 봐.” “어쩌면 월말에 한꺼번에 식대를 정산할지도 몰라. 낄낄.” 가뜩이나 관광지와 떨어진 로컬 식당이라 입 밖으로 내뱉는 말들이 거칠 게 없다.

 

“안녕하세요. 뭐 드실 건가요?” 웨이터의 입에서 나온 한국말을 듣고도 한참이나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 당황한 그 남자와 나는 웨이터 너머로 다른 테이블을 허둥지둥 둘러본다. ‘이상하다.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는데……’ 분명 백인 웨이터인데 그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온다.

 

그는 12년 전, 서울에서 2년 동안 일하며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어디까지 들었을까? 이상한 말을 하진 않았나?’ 머리를 재빠르게 돌리는 와중에 그는 너무 반갑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휴~ 다행이다. 성수동과 동대문은 그대로인지 묻는다. 공장밖에 없었던 성수동이 지금은 압구정처럼 변했다고 하니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보신탕이 그립다고 한다. 으응? 우리도 안 먹는 보신탕을? 눈을 찡긋거리며 ‘빌바오 음식은 단순하고 맛이 없어’ 라는 말도 덧붙인다. 매일 너네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저 할아버지와 우리는 바스크 음식을 너무 사랑한다고!

 

그런데 이 스페인 청년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동대문에서 일했다고? 공장 노동자로 근무하진 않았을 거야. 백인이잖아.’ 내 안의 어떤 편견들로 인해 그에게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동대문에서 일을 했지만 그가 옷을 만드는 재단사나 시다, 미싱사는 아닐 거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 롬복에서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현지인을 만난 적 있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쉬이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내 생각과 달리 한국에 온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얼굴색만으로 그가 어떤 일에 종사할지 미리 판단하는 나쁜 버릇이 내게도 있다. 동남아인들은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조선족은 한식당 혹은 유모 일을 할 거라는 편견 말이다.

 

얼마 전, BBC 방송사고로 홍역을 치른 켈리 교수의 아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유모일 것이라는 인종차별적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거칠 것 없는 빠른 판단(아이를 잽싸게 문밖으로 끌어내는 상황)을 보면서 다행히 나는 아이의 엄마라고 확신했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게다. 나라는 사람이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내 사고에 편견이 깃들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녀,-여행사정-28-02@빌바오.jpg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 오는 날은 우산을 판다는 거다.

 

얼굴색 다른 너, 나, 우리

 

한국은 휴가철 시작과 함께 연일 폭염이라는 기사를 접했다. 스페인이 속한 이베리아 반도도 7월부터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전 세계 이상 기후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이 불구덩이 속에서 붉은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빛나는 곳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이다. 한여름에도 바스크는 최고 기온이 30도 이상 오르는 경우가 잘 없다. 그래서 기온을 수시로 살피다가 25도가 넘는 날(보통 일주일에 이틀 즈음)이면 우리는 수영복을 안에 입고 어김없이 바다로 향한다.

 

빌바오 시내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 아름다운 해변, 플랜치아Plentzia. 해변 입구에서 흑인들이 가판을 열고, 조악한 짝퉁 운동화며 가방 그리고 천으로 만든 돗자리 등을 팔고 있다. 관광객이 드나드는 휴양지가 아닌 다음에야 현지인들이 공장 냄새 폴폴 나는 이런 싸구려 물품에 눈길을 줄 리 만무하다. 이들도 물건을 파는데 딱히 열의는 없어 보이고 그늘에 앉아 자기들끼리 수다 삼매경이다. 눈에 띄는 물품도 보인다. 바다 앞에서 ‘방수팩’을 팔아도 모자랄 판에 큐빅 박힌 ‘휴대폰 케이스’를 들고 나온 저 호기로움은 무얼까? 상대적으로 가볍고 많은 물건을 가판에 깔 수 있어서일까?

 

한국의 유명한 워터파크에 온 것보다 더 재미있는 파도타기 놀이를 대서양 바다에서 할 수 있다. 어린이, 소년 소녀들, 청춘들, 할아버지들 할 것 없이 모두 대자연이 선사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오늘따라 날이 더워서인지 해운대 못지않은 인파가 해변으로 몰려나왔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백인을 제외한 다른 피부색을 지닌 이는 우리뿐이다. 팔리지도 않은 가판은 집어치우고 물놀이나 함께 하면 좋으련만 흑인들은 찾아볼 수 없다. 여기까지 와서 바다에 몸은 담그고 가는 것일까?

 

물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 앞에 만물 백화점이 보인다. 천장까지 쌓아둔 물건들 중에서 손님들은 과연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싶은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이곳에 있다. 그래도 흑형들의 가판대와 달리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와 번듯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이런 가게들은 여지없이 중국인이 운영한다. 이들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데 바다에서 동양인은 우리밖에 볼 수 없는 이유다. 일하는 중국인 밖에 만나보지 못한 이 곳 바스크 사람들이 여행하는 우리를 보고 대뜸 ‘일본 사람이야?’라고 묻는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동양인이라고는 일하는 중국인, 여행하는 일본인 그리고 미지의 한국인으로 나눠진 듯 보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중국인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인들은 놀 줄 모르고 돈만 모아.” 하얀 피부를 보면 일하느라 바다에 놀러 갈 시간이 없다고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이 보기에 중국인은 배금주의로 물든 사람들이다. 스페인에 오래 살고 이들처럼 시민권을 얻었지만 문화만큼은 자신들의 것을 따르지 않는 그저 ‘중국인’ 일 뿐이다.

 

피부 색깔로 삶의 모습이 극명하게 나눠진 하루였다. 휴일 챙겨가며 노는데 안간힘을 쓰는 스페인 사람들 틈에서 얼굴 노란 중국인은 휴일에도 일을 하고, 얼굴 까만 흑인은 실내도 아닌 실외에서 가판을 연다. 그리고 여기, 팔자 좋은 얼굴 노란 한국인 여행객이 있다. 오늘따라 이들 틈에서 여행하고 있는 우리의 자리가 더 낯설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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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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