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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제일 무서운 이야기

여기 아닌 저기를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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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무서운 건 옛날 옛적 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다른 언어권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2017.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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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공포'라는 말에 심드렁한 편이다. 공포영화나 괴담을 좋아하지 않기에 '여름에 걸맞은 공포 소설!' 이라든가 '당신의 밤을 책임질 납량 스릴러!' 같은 홍보 문구가 붙어도 그렇게 끌리지 않는다. 왜 내 시간과 돈을 들여 무서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가뜩이나 더워서 잠도 안 오는데 무서운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정신 사나워서 더욱 못 잔다. 물론 그 문구는 나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뽑은 게 아니라 등 뒤의 서늘함을 즐기는 사람이 보라고 만든 거겠지만.

 

『야행』은 ''교토의 천재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돌아왔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이후 10년의 집대성'이라는 띠지 문구에 혹해 읽기 시작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어수룩한 남자 대학생인 주인공이 검은 머리의 귀여운 '아가씨'를 쫓아 현실과 망상이 섞인 세계 속을 방황하는 이야기다. 공중부양을 하는 대학생, 헌책시장의 신, 사랑을 위해 일 년 동안 팬티를 갈아입지 않는 '빤스총반장'이 나온다. 전작의 기묘하지만 신나는 분위기가 기억나서 '아, 이 작가!' 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꽤 서늘했다.


줄거리만 소개하면 그렇게 무서울 게 없다. 10년 만에 같은 학원을 다녔던 동기 다섯 사람이 모인다. 10년 전 사라졌던 동기를 떠올리며, 다섯 명 모두 <야행>이라는 그림에 얽힌 기괴한 경험을 하나씩 이야기한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가서 불 꺼놓고 둘러앉아 자기가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돌아가며 이야기하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호텔 복도에 서 있는 것은 그 종업원이었다. 문에 찰싹 달라붙듯 바싹 붙어 있어서 도어뷰로 보이는 그의 머리는 괴물처럼 크게 보였다. 숱이 많지 않은 머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문에 찧고 있었다. 방금 전에 들린 쿵쿵 하는 둔탁한 소리의 정체는 그 동작이었다.
- 『야행』, 50쪽

 

소설은 영화처럼 깜짝깜짝 놀래키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베이스를 둥둥 울리며 점점 박자가 빨라지다가 주인공이 돌아보는 순간 온갖 관악 소리를 크게 틀어 혼비백산케 하는 영화, 정말 별로다. 그나마 영화보다는 소설이 일부러 놀래는 티가 나지 않아서 덜 싫어하는데, 『야행』은 깜짝 놀라는 일 없이 저런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스물스물 오싹해진다. 덕분에 하룻밤이 서늘하니 즐거웠다.


사실 무서운 책은 많다. 너의 노후는 결딴났다고 친절하게 데이터로 알려주는 사회과학서를 읽으면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가 있나 싶다. 제일 무서운 건 옛날 옛적 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다른 언어권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여기 아닌 저기를 보고 싶어서. 누구나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일어나는 한여름 밤의 꿈.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무섭지만 표지를 덮으면 거짓말처럼 없어질 세계들.


사람들은 소설을 칭찬할 때 '진짜 같은 이야기'라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쓰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한국 대통령이 무당의 사주를 받았다거나 미국의 대통령 아들은 트위터로 자기가 범죄자라는 증언을 한다거나, 그런 것들 있잖은가.


알지 못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 대신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들은 그 비슷한 상황만 처해도 등골이 쭈뼛 선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 공포가 된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도 즐겁고 아름답게 그려놨지만, 결국은 스토커 이야기가 아닌가. 스릴러 소설마다 여자가 실종되고 죽고 강간당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는 재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화장실에 뚫린 구멍이라든가, 길가에서 갑자기 모르는 사람에게 염산을 뿌리거나 몽둥이로 때리는 사건 뉴스를 보고 나서 일어나는 생각들. 한 번 떠오른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저께 친구를 만나 몰카 경험담을 듣고, 어제 퇴근하는 길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치마 아래를 찍는 고등학생을 보면서 무뎌지는 내가 더 무섭다.


그 새끼, 잡을걸......


무엇이 무서운가. 무섭다는 건 어떤 대상이 꺼려지거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나는 상태다. 두렵다는 건 어떤 대상을 무서워해 마음이 불안한 상황이다. 데이트 폭력으로 입건된 사람이 작년에만 8천여 명이고,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이건 책을 덮어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데, 이 정도면 뭐라도 대비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 새끼 잡았어야 했는데.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뭘 해야 하는 걸까. 일단 잠을 많이 자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걱정만 하고 있지 말아야지. 저번 주는 너무 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6개의 단어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써냈다는데, 나는 3개의 단어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집에 에어컨이 없다.


여름 휴가는 아직 멀었다. 이번 여름은 일본에 다녀올 예정이다. 여기만큼 덥다는데, 굳이 가서 얼마나 더운지 확인하고 오겠다. 일본 소설이 많이 나오는 시즌이기도 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 미스터리 시리즈 『희망장』도 검증된 작가고, 누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두근거리는 상황이 싫다면 곤도 후미에의 귀여운 코지 미스터리 『샤를로트의 우울』도 즐겁게 추천해줄 수 있다. 대형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도 나왔다니, 무엇을 읽어도 여기 아닌 저기는 시원해 보인다. 부담 갖지 말고 한 번쯤 읽어 보시기를. 되도록이면 에어컨 있는 안전한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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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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