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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에게 처음으로 반한 순간

연약함 속의 위엄을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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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합일의 시절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우리를 비굴하거나 무책임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힘이 아닐까.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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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궁수축이 시작되고, 자궁경부가 벌어지고, 태아의 머리가 골반까지 내려오면, 태아는 팔다리를 몸에 딱 붙이고, 머리를 돌려 산도를 통과한다. 머리가 나오면 태아는 다시 몸을 회전시켜 한쪽 어깨를 밀어내고 다시 나머지 어깨도 밀어낸다.”

 

임신 말기 남편과 함께 라마즈 출간 강의에서 들은 내용 중 한 대목이다. 출산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걱정할 것 없다고 위로하는 강사님의 말씀이 무색하게도, 알면 알수록 더욱 심란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위의 대목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고령 임신부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경향이 있다고 하기는 한다)

 

임신과 출산기에 태아가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에서 본 내용에 따르면, 출산 시에 태아가 산모보다 2배 이상의 힘을 들이고 2배 이상의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아무리 말랑말랑하다고 해도 두개골 형태가 바뀔 정도의 고통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지 않은가.

 

나는 책도 보고(임신 초기부터 구입해댄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책들만 몇 권이던가!) 강의도 듣고(라마즈 강의를 저렇게 열심히 들어놓고도, 막상 출산 당일에는 호흡이고 뭐고 당장 무통주사를 놓으라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던 내가 아닌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하면서도 자신이 없는데, 아이는 어떻게 혼자서 저렇게 척척, 몸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지난한 탄생의 과정을 겪어낸단 말인가! 우리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탄생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그 순간 나는 곧바로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반해버렸다.

 

사실 그 이전까지 내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사람’이라는 이성적 의식은 있었지만, 정서적으로는 그 ‘존재’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남들은 임신 2개월부터도 태담을 한다던데, 나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듯한 어색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임신 중기에 초음파를 보다가 아이가 눈을 반짝 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긴 하다. 그렇게 경이로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살짝 마음이 열린 정도였을 뿐 그 존재를 강하게 느끼지는 못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위의 설명을 듣는 순간, ‘엄청난 힘을 지닌 나약한 존재’, ‘아무것도 못 하지만 사실은 많은 걸 하는 존재’라는 강력한 아기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나보다 훨씬 연약하지만 너무나 든든하고 믿음직한 존재. 이런 매력적인 존재에 대한 경탄은 힘겨운 신생아 시기의 육아를 이겨낸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2.

아기는 뱃속에 있을 때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스스로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존재였고, 엄마인 나에게 그때 그때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존재였다. 태어나고 나서도 아기는 언어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울음소리만으로도 자신의 욕구를 명확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곤 했다. 아기 울음소리가 어찌나 당당하고 우렁찼는지, 울음이 터지면 낮이건 밤이건 30초 안에 아기가 원하는 것을 대령할 정도로 나는 군기가 꽉 잡힌 엄마가 되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보스 베이비>의 원작 그림책인 『꼬마 대장님』은 이런 아이의 권위에 대한 감각을 유쾌하게 확장시킨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고양이와 개, 혹은 거리의 비둘기 같은 동물들도 취약하지만 위엄 있는 존재로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순간들이 있다. 약한 존재 안에 숨겨진 힘을 발견하는 경험은 부모가(조금 더 확장하면 돌보고 보살피는 사람들 모두가)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이다. 작고 여린 것이 강력하게 내뿜는 요구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피고 반응해야 한다는 돌봄의 큰 원칙 밑바탕에 이런 존중의 감수성이 자리 잡고 있다. 돌봄은 이런 감수성을 극대화한다. 약한 것에 대한 존경, 약한 것에 대한 경탄, 약한 것에 대한 복종은 약한 것은 함부로 해도 된다거나, 약한 것은 불쌍한 것이라는 감수성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감수성이다.


3.
아기의 위엄을 잘 설명하는 용어로 ‘유아기의 전능감’이라는 것이 있다. 유아기의 전능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아기 폐하(His Majesty the Baby)’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해,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컷 등 정신분석학자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모든 욕구가 태반을 통해 자동적으로 충족되는 자궁에서 열 달을 보낸 태아는 당연히 자신의 욕구가 바로 바로 처리되기를 바란다. 자신이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고, 나아가 자신이 세상과 우주 그 자체이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이상향’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이것이 ‘전능감’의 원천이다.

 

그런데 태아가 세상에 나오게 된 후에는, 이런 욕구를 엄마, 아빠 등의 양육자가 충족시켜줘야 한다. 24시간 풀가동되는 태반과 달리, 엄마, 아빠 등의 양육자는 자신들의 의식주 및 생활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노동과 휴식을 하며 아기를 돌본다. 아기의 섭식, 배설, 수면 등의 욕구가 즉각적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경험은 아기들이 자신의 무능력함을 고통스럽게 인정하도록 만든다. ‘전능한 내가 이렇게 젖어 있다니!’ ‘전능한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프다니!’ 자신의 불완전성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고, 많은 전문가들의 말대로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가 이 좌절을 건강하게 잘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완벽한 합일의 시절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우리를 비굴하거나 무책임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힘이 아닐까. ‘인간의 존엄성’을 쟁취하려는 노력도 이에 기반해온 것이 아닐까. ‘유아기적 전능감’은 인간이 나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표식 같은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조항으로 시작하는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이야말로 그 증거가 아닐까.

 

‘김희진의 돌봄 인문학’ 한 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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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희진(인문서 편집자)

6세 여아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문서를 만드는 편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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