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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만, 이 내용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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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연출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박열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세계관, 사회관, 국가관 등을 현재 시점에도 대입시켜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와는 다른 연출을 시도했다.” (201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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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의 한 장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예, ‘허남웅의 영화경’을 연재하는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고백하는 건 아니고, 박열이 쓴 시(詩) 「개새끼」의 첫 문장이다. 욕설 때문에 기분 나쁘신 독자분들이 계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다만, 실례를 무릎 쓰고 이 시를 좀 더 소개하자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짓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꽤 도발적이면서 에너지가 넘친다. 그야말로 젊음의 객기(?)가 압도적이다. 주인공은 ‘조선의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박열이다. 1902년생인 박열이 1922년 ‘청년 조선’에 이 시를 발표했던 당시는 약관 스무 살이었다. 이 시를 읽고 박열에게 반한 사람이 있다.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다.

 

가네코 후미코는 「개새끼」를 읽은 후 박열과의 첫 만남에서 서툰 한국말로 “우리 동거합시다” 애정 고백을 갈음해 청혼한다. 시 한 편 읽고 자신의 평생을 상대방과 나누려 한다? 도발적이고 호탕하고 당당한 문장과 내용 탓만은 아니리라. 시의 행간에서 더 중요한 무언가를 읽고 박열이라는 인물의 진의를 꿰뚫어 본 결과일 테다.

 

그건 박열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영화 <박열>을 만든 이준익 감독의 심정과 맥을 함께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열>의 첫 장면, 도쿄에서 일본인을 태우고 인력거를 모는 박열(이제훈)의 모습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처럼 비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일본인 손님이 요금을 내겠다며 돈을 땅에 던지자 고개를 조아려 이를 주우려는 박열의 모습은 흔히 일제강점기 영화에 습관처럼 등장하는 못돼 먹은 일본인 대 선한 한국인의 구도를 답습하는 듯하다.

 

그런 인물이 자신을 개새끼라고 칭하면서 시를 쓰지는 않았을 터. 박열이 처음엔 고개를 조아리던 일본인 앞에서 모자란 돈을 받기 위해 태도를 싹 바꿔 도리어 호통을 치는 모습은 독립운동가를 다룬 여느 영화의 주인공 상(像)과는 뚜렷한 변별력을 갖는다. 왜 아니겠는가, 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독립운동가보다 아나키스트로 바라본다. 그럼 아나키스트 박열을 있게 한 ‘아나키즘 anarchism’은 무엇인가.

 

아나키즘은 모든 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을 뜻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박열만큼이나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존재가 중요하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를 반대하며 항일운동을 하는 여성, 아니 그가 박열과 동거하며 부탁했던 표현에 따르면, 신념의 동지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국가와 민족과 이념 따위에 상관없이 그들이 옳다고 판단한 신념에 맞춰 계획을 짜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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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의 한 장면

 

이들의 아나키즘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건 일명 ‘괴사진’으로 불린 사건이었다. 1923년 간토(關東,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내각은 민란의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때문에 무고한 조선인 6천여 명이 일본인 손에 죽는 이른바 간토 대학살이 벌어진다. 이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던 일본 내각은 사건을 은폐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불령선인’(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박열을 비롯해 말 안 듣는 조선인들을 지칭했던 말) 박열을 지목한다.

 

일본 내각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그들의 끔찍한 만행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황태자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조선 최초의 대역죄인이 되어 사형까지 무릅쓴 공판을 시작한다. 실제로 사형선고를 받기 전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부탁해 남긴 게 바로 괴사진이었다. 이 괴사진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밝은 표정과 그것도 포개 앉은 자세로 사진을 찍어 일본 내각을 농락했다. 조사를 받던 남녀가 저렇게 불령한 자세로 온갖 영상이 금지된 감옥에서 사진을 남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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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아 보이지만, 이 내용은 실화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만들면서 실제 사실에 기초한 정도가 아니라 당시의 일본 신문을 비롯해 기록물들을 샅샅이 뒤져 사건은 물론 극 중 인물들의 대화까지 철저하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괜한 애국심에 도취하여 그동안 잊힌 영웅을 미화하지 않겠다는 영화의 태도이면서 실화가 전제하는 사실성으로 동시대성을 확보하려는 이준익 감독의 전략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은 늘 시대극을 우회해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사도>(2015)는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 없는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그런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가 좌절하는 아들 사도(유아인)의 관계를 통해 오로지 돈과 성공만을 바라며 개발 시대를 통과해 온 아버지 세대와 그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식 세대 사이의 갈등을 은유하고 화해를 모색했다. 또한, <동주>는 격렬한 몸싸움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시와 같은 문(文)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20대 시절 윤동주의 모습으로 과도한 입시 경쟁에, 비싼 대학 등록금에, 대학의 낭만이 다 모야 취업 때문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현대의 젊은 세대의 상황을 투영했다. 

 

그런 점에서 <동주>는 물론 <박열>은 일제 강점기 배경의 영화이면서 언제부터인가 한국영화에서 실종된 청춘물까지 끌어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박열이 아나키즘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듯이 현대의 젊은이들 역시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국정농단 사태를 맞아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 등과 같은 것에 상관없이 살기 좋은 세상,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헉명을 이뤄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촛불 인파를 가로막는 공권력과 대형 차량 저지선에 맞서 격렬히 몸을 부딪치기 보다 재치 있는 문구가 들어간 피켓을 만들어 들고, 국정농단 주역들의 코스프레로 웃음을 유발하고, 대규모 콘서트를 통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촛불 시위가 끝나면 깨끗하게 쓰레기를 줍는 등의 놀이와 같은 저항으로 이전과는 다른 시위 문화를 주도했다. 이는 사형을 선고하고 돌아서는 판사를 향해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와 같은 말을 날리고 감옥 안에서 애인과 함께 불경한 포즈로 괴사진을 찍었던 박열이 불의에 저항한 방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연출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박열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세계관, 사회관, 국가관 등을 현재 시점에도 대입시켜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와는 다른 연출을 시도했다.” 그와 같은 감독의 의도는 극 중 박열의 다음 대사에 압축된 듯하다.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박열의 육체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의 정신은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힘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서 보인다는 것이 더더욱 고무적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박열>은 한국의 청춘에게 보내는 감독의 영화적 헌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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