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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남한산성』, 100쇄 기념 ‘아트 에디션’ 출간

첫 출간 후 10년 만에 100쇄 돌파 ‘아트 에디션’ 출간 기념 김훈 작가 기자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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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언어와 관념의 문제인데, 이것은 지금 현재까지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 못지않은 관념의 늪에 빠져 있어요. 내가 『남한산성』을 쓰던 고뇌와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고통이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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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 서울 청운문학도서관에서 『남한산성』의 100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2007년 출간된 『남한산성』은 59만부가 판매되며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100쇄 돌파를 기념해 선보이는 ‘아트 에디션’에는 한국화가 문봉선 홍익대 교수의 그림 27점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가 김훈이 연필로 쓰고 화가 문봉선이 붓으로 그린 『남한산성』은 두 거장의 만남이 빚어낸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다.

 

김훈 작가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시대, 말, 관념, 야만성 같은 것들 속에서 삶이 빚어내는 풍경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이 목표였다며 “그런 풍경은 말과 길로 요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림에 관해 문봉선 화백과 논의한 적도 없고, 개입하거나 조언한 적도 없다며 “문 화백은 자신의 미술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작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남한산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훈은 “문봉선 화백이 그린 표지 그림을 보면 인간이 걸어갈 수 없지만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문봉선 화백은 손철주 미술평론가를 통해 소회를 전했다. 그는 “소설이 펼치는 역사의 무거움을 마음에 새겼다. 여러 차례 현장 답사를 통해 사실적 접근에 힘썼다. 계절은 혹독한 겨울이요 장소는 가파른 산성이라, 모진 악조건 속에서 옥죄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수묵의 색은 흑백(黑白), 건습(乾濕), 농담(濃淡)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먹의 깊이와 붓의 생동감을 살리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나를 괴롭힌 것은 ‘언어와 관념의 문제’

 

지난 10년 동안 『남한산성』을 아껴준 독자들에 대한 고마움, 문봉선 화백과 함께 작업한 소감으로 인사를 대신한 김훈 작가는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다. 『남한산성』을 집필하는 동안 ‘언어와 관념의 문제’를 고민했다는 그는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 못지않은 관념의 늪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 소설에서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언어와 관념의 문제인데, 이것은 지금 현재까지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 못지않은 관념의 늪에 빠져 있어요. 국회 청문회에서 장관 후보를 향해서 ‘북한은 주적이냐 아니냐, 국가이냐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해요. 이런 것은 정말 관념에 빠진, 썩어빠진 질문입니다. 북한은 강한 무력을 가진 군사적 실체이고, 주민들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고 대화의 대상입니다. 북한이 주적인지 아닌지, 국가인지 아닌지 묻는 것은 병자호란 때 우리가 청나라를 대한 것 같은 아주 몽롱하고 무지한 관념에 빠져 있는 질문이죠. 우리는 먼저 이런 질문과 언어를 추방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의 모습이 보이는 거죠. 모호한 관념들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발전을 가로막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내가 『남한산성』을 쓰던 고뇌와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고통이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된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어쨌든 약소국가로서 강대국들 틈에 끼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병자호란 때 항복한 다음에 군사적 주권, 외교적 주권을 포기했죠. 청나라에 굴욕적인 사대를 바침으로써 200년 이상 살았죠. 그 전에는 명에 대해서 사대를 바쳤고요. 나는 이런 것을 인정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에요. 치욕스러운 역사죠. 그러나 영광과 자존만이 인간의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죠. 치욕과 모멸 또한 역사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사대라는 것은 한 약자가 강자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써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랑이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생존술로써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것을 교과서에서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빼고 뭉개려고 하는 것은 참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런 세계 패권주의적인 발언은 그 사람의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자신을 계속 전환해 나가면서 대처하는 삶의 길이 있는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병자호란으로) 주권이 유린당한 후에 우리의 자존심과 주권을 회복해야겠다는 북벌정책이 있었어요. 나는 북벌 정책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 후에 벌어진 북학의 지식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가는 것은 180도 거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인들의 전환이 조선 사회의 역동성이고 우리의 주권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기를 전환시킬 수 없는 자들은 다 멸망하는 거예요. 이것은 다윈의 진화론에도 나와 있는 모든 동물의 영원한 법칙이죠. 그러나 북학이 조선을 개조하려는 노력은 실패했죠. 정치권력과 연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결국 조선은 멸망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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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글을 쓰고 싶다


올해 칠순을 맞은 김훈 작가는 앞으로 서너 개의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역사나 시대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글을 써보고 싶다. 판타지라든지, 상상의 세계로 끝없이 이야기를 끌고 나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소망대로 될지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남한산성』이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어쨌든 독자들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문장의 힘이 많은 도움이 됐지 않나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살을 붙인 이야기인 만큼 “문장이나 인물의 내면으로 이야기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에 나온 이야기는 역사책에 다 나와 있는 거예요. 스토리의 디테일은 내가 지어냈지만 메인 스토리는 역사에 나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문장이나 인물의 내면, 살아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내면으로 이야기를 몰고 들어가는 것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저한테 문장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글 쓰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주제의식과 강렬한 이념적 지향성, 강한 정의감, 강한 문제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장인의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나마나 한 거예요. 이룰 수가 없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문봉선 화백이 수많은 붓을 만들어서 쓰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작가가 문체를 고안해내듯이 자신의 연장을 만들어서 쓰는 것이죠.”

 

익숙한 공간과 낯선 공간을 오가며 작품을 집필했던 그는 얼마 전 『격몽요결』을 읽고 느낀 바가 있다며 농담 섞인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격몽요결』을 봤더니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면서 집필시기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녀석들은 학자가 되기 힘들다고 쓰여있더라고요. 종이가 좋지 않아서 눈이 아파 책을 읽을 수 없다고 말하는 녀석들이 늦게까지 술 먹고 논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 시대에도 나 같은 놈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런 타령을 하지 말고 아무데나 앉아서 진득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웃음).”

 

역사 소설 집필 계획에 대해서는 “역사에 특별한 애착이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쓰고 싶은 주제를 설정했을 때 그것을 가장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시대를 골라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관념과 언어와 속세의 길이 부딪히는 대목을 써보자 해서 『남한산성』을 쓴 것이고, 정치권력과 인간의 갈등, 약육강식의 세계를 쓰자고 생각했을 때는 『칼의 노래』를 썼어요. 『현의 노래』는 가야 이야기인데, 무기의 세계와 악기의 세계가 부딪히는 공간이죠. 인간 사회를 변용시킬 수 있는 게 두 가지가 있잖아요. 하나는 무기이고 하나는 악기죠. 무기는 폭력을 통해서 악기는 아름다움을 통해서 세상을 변용시킬 수 있는데, 신기하게도 가야 시대에는 그 두 개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대가야는 가장 막강한 철제 무기를 만들면서 또 가야금을 만들어냈죠. 인간의 역사로 보면 아주 신기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무기와 악기가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자고 생각해서 가야 시대를 선택한 것이죠. 역사 자체에 대해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주제에 따라서 시대를 선택해온 것이죠.”

 

그는 자신의 단편소설 「언니의 폐경」을 둘러싸고 ‘여성을 사물화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솔직한 입장을 밝혔다.

 

“저의 소설에서는 여성이 거의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중요한 역할을 안 해요. 『남한산성』은 여자가 하나도 안 나와요. 남자들끼리만 우글거리면서 치고 받는 거죠. 『칼의 노래』에는 앞부분에 여자가 조금 나오다가 바로 죽어버려요. 그 후에는 여자가 안 나오죠. 여자가 나오더라도 사소한 역할을 하는데요. 나는 여자가 나오면 쓸 수가 없어요, 진짜로. 왜냐하면 너무 어려워요. 여자를 사물로 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 저는 여자를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매우 서툴러요. 여자의 생명을 묘사하는 것은 내가 할 수가 있어요. 어떤 생명체로서 보는 경향이 나한테 있는 것이죠. 그런 것들은 나의 미숙함이라고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내가 여자에 대해서 무슨 편견이나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언니의 폐경」이 그렇게 읽혀진다는 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남한산성』 100쇄를 기념해 출간된 ‘아트 에디션’에는 10년의 세월이 지나 소설가 김훈이 비로소 털어놓는 이야기가 ‘못다 한 말’로 실려 있다. 문봉선 화백의 그림과 함께 『남한산성』을 색다른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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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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