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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휴머니즘

사랑이 없는 책임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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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염치불구하고 조금 행복한 편이다. 언제까지 ‘행복한 내일’을 꿈만 꿀 것인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생각을 바꾸는 수밖에...

 

10화 그림.jpg

 

“개는 왜 이렇게 자기 사생활도 없어?”

 

일편단심 고양이 집사 내 친구 정아가 계획에 없던 개를 데려오게 되면서 온 일상이 뒤흔들리자 남긴 말이다. 개를 사랑하지 않는 정아가 개를 돌보는 일상은 누가 봐도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책임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정아가 대단하다. 사랑을 해도 책임감은 부담스러운데 사랑이 없는 책임감이라니! 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휴머니즘이 아닐까.

 

며칠 전, 한 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보내는 사람’은 세무서다. 옆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오늘 낸 세금, 행복한 내일로 돌려받습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다.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지금까지 환급받은 해가 세납한 해보다 더 많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물을 반찬 삼아 밥 먹고 지내던 어느 시절에 알게 된 사실은 그나마도 소득이 너무 너무 적으면 환급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 동안 낸 세금으로 따지면 암만해도 불행해야 되는데 나는 염치 불구하고 조금 행복한 편이다. 언제나 그렇듯 되게 우울했던 몇 년 전 어느 날, 지인이 평균수명을 계산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를 알려준 적이 있다. ‘흡연을 하십니까?’ ‘가족 중에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혼자 삽니까?’ 이런 질문들 끝에 마지막 질문인 ‘행복합니까?’에 yes를 표시하는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내심 테스트 결과를 잘 받고 싶어서 그런 건지 진짜 내가 행복한 건지 나도 헷갈리지만 어쨌든 이러자고 결정했다면 나의 우울증은 기본값으로 두고 앞으로는 입장 정리를 다시 하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염치불구하고 조금 행복한 편이다. 언제까지 ‘행복한 내일’을 꿈만 꿀 것인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생각을 바꾸는 수밖에...

 

2009년 즈음, 박감독님 댁엔 두 마리의 블랙 러시안 고양이가 있었다. 당시 나는 감독님 댁에서 꽤 긴 나날을 시나리오 작업 했는데 그 때 내가 머물던 방엔 고양이 두 마리도 같이 살고 있었다. 두 놈은 나한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뭐 쫌 어쩔라 치면 어찌나 신경질을 부리는지. ‘누군 뭐 좋아서 니들이랑 같이 사는 줄 아니. 나도 원래 고양이 는 안 좋아했다고’ 아쉽지 않았다. 낮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정도로 감독님과 사모님이 항상 계셨다. 좋은 공기와 자연,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식구들도 밤이 되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나면 매일 밤 혼자 남은 내 근처엔 지들끼리 아웅다웅 지내는 고양이 두 마리뿐이었다. 서서히 심연으로 가라앉는 이 기분이 외로움인지 모르고 지내던 중 그 날도 긴 작업을 마치고 방에 누웠다. 아무 이유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따뜻한 눈물이 주루룩 내 볼을 타고 베갯잇을 적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맙소사 기적이 일어났다. 두 마리 중 한 놈이 슬쩍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팔에 탁 붙어 앉아 제 얼굴을 내 살에 맞대고 조용히 부비는 것이었다. ‘나 이거... 지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 놈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고양이즘이 아닐까. 내 마음의 스위치가 반짝. 켜졌다. 이후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두 놈 중 누구와 잤는지 알고 싶은데 구별을 못 하겠고 두 놈 모두 까칠하기는 전날과 마찬가지라서 나는 지금도 그 날 밤 일만 떠올리면 꼭 귀신한테 홀린 기분이다.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날부터다. 상대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순간은 참 이렇게 느닷없고 마치 트라우마처럼 내 마음 속에 새겨진다.

 

나는 서울에서 났고 강남 8학군 언저리로 일찍이 전학을 해 그곳에서 자랐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빈부 격차가 아주 심각했다. 이 곳으로 전학을 와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일부 아이들만 등하교 시켜주는 노란색 스쿨버스도, 일부 아이들만 누리는 급식 환경도 아니었다. 우리 반에서 제일 몸집이 큰 여학생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2교시 끝나면 나눠주는 우유급식은 매일 그 아이의 책상에 산처럼 쌓였다. 많은 아이들이 흰 우유를 싫어했고 매번 결식하는 그 친구한테 불쌍하다는 핑계로 다 갖다 버렸기 때문이다. 남자 운동선수도 하루에 그 많은 우유를 전부 먹을 수는 없다. 나는 그 친구가 우유를 먹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지만 점심시간에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우는 모습은 자주 봤다. 이런 상황을 완벽하게 방치했던 그 때 담임을 지금도 기억한다. 트라우마였다. 궁극의 휴머니즘도 고양이즘도 그 어떤 수치심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와아! 이 거지같은 동네에선 아무도 믿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머릿속으로 외쳤다.

 

며칠 전, JTBC 대선토론을 보았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하고 사형을 안 시키니 흉악범이 날뛴다는 어느 후보의 논리를 듣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 인성을 무너뜨릴 가치도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말자. 자... 심호흡을 하고 궁극의 휴머니즘을 떠올린다. 그리고 궁극의 고양이즘을 떠올린다. 아...냐 안 돼, 난데없이 돼지가 떠오른다. 안 돼, 돼지는 안 돼. 너무 끔찍해. 우울하다. 안 돼. 빙글빙글 춤을 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외친다.

 

나는 조금 행복한 편이다. 그러니까,
오늘 낸 세금, 행복한 내일로 돌려줘!
그리고 제발 우리 모두에게 수치심을 되돌려줘!

 

내가 먹기 싫은 우유를 돈이 없어서 굶는 아이에게 버리는 일이,
돼지발정제를 먹이고 강간을 시도한 일이,
동성애를 차별하는 일이,
그게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도와줘 제발 고양이들아!!!!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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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경미(영화감독)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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