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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황주리 “소설은 뒤늦게 만난, 자유를 향한 발걸음”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기 때문에 드는 강렬한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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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생각의 씨줄, 날줄을 뜨개질 해나가는 일인데 이걸 멈추지 못하는 거죠. 특히 저 같은 사람에게는 뜨개질로 스웨터를 만들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는데, 심지어 스웨터를 만들면 하는 거나 잘하라며 욕도 하는데(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개질을 계속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 쓰는 화가 황주리. 황주리에게 그림은 그 자체로 자신이다. 다섯 살 때부터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온 작업이다. 그는 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서 행복을 느낀다. 앞으로도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한편 소설은 뒤늦게 맞본 자유 같은 것. 매일의 일과를 온전히 그림에 쏟아 붓는 틈에 화가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뜨개질’을 한다. 그렇게 가끔 뜨개질을 하다보니 어느 새 스웨터가 완성되었다.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는 황주리의 두 번째 스웨터다.


생각해보면 이야기 만드는 것을 늘 좋아했다. 열 살 때, 한 달 치 일기를 미리 써놓았던 적이 있다. 가정 방문을 한 담임 선생님께 들통이 나긴 했지만 황주리는 그것을 “나의 첫 소설 수업”이라고 말한다. 다만 작은 메아리를 낳을 수 있는 스웨터를 몇 벌 뜨고 가고 싶다는 화가 혹은 소설가의 목소리가 총총히 빛나 보였다.


무엇보다 이 ‘그림소설’이 주는 독서의 새로운 즐거움이 소중하다. 활자와 활자 사이에 놓인 화가 황주리의 오랜 작품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가 하면 그림과 그림 사이에 놓인 소설가 황주리의 이야기들이 다채로운 빛을 내며 다가온다. 말하자면 그림을 ‘읽고’ 소설을 ‘보는’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들이다. 여러 죽음과 후회, 강렬한 사랑과 이별이 그림으로, 글로 표현되어 숨은 감각마저 일깨운다. 책을 덮자, 곧바로 다음 스웨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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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그 시간에 대한 명상


독서에 다양한 자극을 주는 작품이에요. ‘그림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어떻게 해서 쓰인 소설들인지 먼저 묻고 싶습니다.

 

공통적인 주제를 잡아보자면 이별에 관한 명상 같은 거예요. 이별에 대처하는 법을 오래도록 생각해온 사람의 이야기죠. 이별에 대처하는 법을 끊임없이 생각해왔어요. 에세이로도 계속 써왔고요. 그러다가 보니까 이별에 맞닥뜨리고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 등등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나의 이야기 혹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건너는 이야기죠. 그런 공통적인 주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별에 대처하는 법이란 사실 없거든요. 방법은 없고, 시간밖에 없는데요. 그 시간에 대한 명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결과가 중요하다기보다 그 순간순간에 대한 채색 같은 게 더 중요한 거죠.

 

오래도록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해온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감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온 걸 텐데요. 제가 이별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건 할머니였어요. 삼십 대에 혼자가 되신 할머니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았어요. 할머니가 98세까지 사셨는데 매일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던 거예요.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네가 학교 들어가는 걸 볼지 모른다는 말씀을 늘 하셨어요. 저는 매일매일 죽음에 시달렸어요. 오늘은 할머니가 안 돌아가셨다, 의 연속이 98세까지 된 거죠.(웃음)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달리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해왔던 게 사실이고요.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전에는 동생이 세상을 떠났어요. 이런 여러 가지 이별을 겪으면서 생각을 했던 거죠.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는 이별에 대한 명상을 말이에요. 순간순간 박혀있는 것들이 사랑이라면 전체적인 이야기는 이별이라는 생각이에요.

 

무엇보다 그림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들었어요.


굳이 구분을 하는 게 무의미하기는 해요. 예를 들어 동생이 사랑하던 불독을 제게 맡긴 적이 있어요. 그 녀석을 4-5년 키우면서 그림 38점을 그렸어요. 그 개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림들을 회상하다보니까 글이 쓰이게 된 거거든요. 꼬냑을 마시는 모습도 있고,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있고 한데요. 이런 모습에서 글이 나왔다고 할까요? 「불도그 편지」는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결국 제 소설은 밥 딜런의 노래가 문학이듯이 내 그림이 문학이면서 내 소설이 그림이 되는 그런 지점에 있는 장르랄까요? 소설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그림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는 지상 전시회이면서, 가장 작은 읽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부제를 사랑박물관이라 지었어요.

 

 

안경 연작도 인상적이에요. 「한 남자와 두 번 이혼한 여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주인공은 저와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인데 안경에 관한 생각에는 제가 곳곳에 꽂혀 있죠.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썼고, 안경을 오래도록 모았거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돋보기안경 몇 개가 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선글라스가 남더라고요. 유품으로 남은 안경이 굉장히 강한 인상을 줬어요. 90년도에는 아우슈비츠에 갔더니 안경이 잔뜩 쌓여있더라고요. 그때 저도 모아둔 안경에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해서 개인의 유품으로써 남겨진 이미지들을 담은 거죠. 전시도 했는데요. 안경에 관한 직업이 그렇게 많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캐릭터를 만든 거예요.

소설 쓰는 재미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할까, 그런 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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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예술은 하나


예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그림을 안 그렸다면 소설가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소설과 산문, 그림이라는 각각의 작업들이 서로 어떻게 공명하는지 궁금합니다. 서로 영향을 끼치나요? 각각의 영역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어떻게 다른가요?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림은 제가 선택을 한 게 아니라 결정지어진 거라고 봐야 해요. 그림은 그냥 나예요. 매일 매일 하는 일이고요. 그림을 그릴 때 참 행복하다고 느끼고요. 지금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내가 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굉장히 복이라고 생각하죠. 반면 글을 쓰는 일은 인연이 닿은 거예요. 사실 모든 예술은 하나죠. 시간을 어디에 더 투여하느냐에 따라 비슷한 수준의 작업을 하게 될 텐데요. 저는 아버지가 출판사를 하셨기 때문에 워낙 집에 책이 많았어요. 독서량이 있었죠. 그러다 대학교 때 우연히 <문학사상>에서 원고가 급히 필요한데 그림 있는 에세이를 쓸 수 있겠느냐고 제안이 왔어요. 그렇게 여기저기 연결이 되어서 신문 칼럼도 생기고 계속 지면이 생긴 거죠. 책도 몇 권 냈고요. 그러다 에세이로 하는 이야기가 너무 한정적이란 생각이 들어 소설을 쓰게 된 거예요.

 

소설은 비교적 뒤늦게 찾아왔군요?


소설은 그러니까 선택이에요. 그림이 아닌 문자 매체로 여러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선택인 것 같아요. 그게 아주 뒤늦게 찾아온 거죠. 소설이란 생각의 씨줄, 날줄을 뜨개질 해나가는 일인데 이걸 멈추지 못하는 거죠. 특히 저 같은 사람에게는 뜨개질로 스웨터를 만들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는데, 심지어 스웨터를 만들면 하는 거나 잘하라며 욕도 하는데(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개질을 계속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의 수공업인데 그것이 제 자신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겠죠. 시대를 초월해 코드가 같은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매개, 그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작은 메아리로 충분해요. 나한테 소설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스웨터를 몇 벌 뜨고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내가 진짜 싫은 사람이 이걸 읽는 게 뭐가 좋겠어요.(웃음)

 

그림과 글을 모두 짜고 있는 작가의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매일 그림을 그리니까 글에 몰입하지는 못해요. 사실은 한 달에 며칠 쓰지 못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10시부터 12시까지 작업하고, 점심 먹고 2시부터 6시까지 그리고요. 저녁 먹고 또 8시부터 11시까지 작업하고 그래요.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영화 두세 편 보려고 하고요.

 

그런데 그림과 소설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잖아요. 작가로서 작품에 대한 감상이 달라지기도 했을까요? 변화가 있었나요?


저는 그냥 매일 그린 사람이거든요. 끊임없이 나의 모든 사고와 세계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그냥 그대로 다 묻어나온 게 그림이죠. 분명히 내가 그린 그림이 맞는데 세월이 지나 그 그림을 훑어보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돼요. 유적을 발견하는 것 같죠. 말하자면 이미지의 고고학이에요. 마치 미리 그려놓은 그림을 뒤늦게 현실에서 발견하는 신기함이 있어요. 내 그림이 굉장히 소설적이고 반대로 소설은 굉장히 회화적인 것 같더라고요. 그것이 다른 사람의 그림과, 다른 사람의 소설과 구분되는 면일 것 같아요.

 

여행지에서의 이미지도 특히 인상적이에요.

 

NGO 단체를 통해 오랫동안 아프리카와 남미를 다녔어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미지들을 얻었죠. 「바오밥 나무를 좋아하세요?」는 나이로비에서 얻은 거예요. 나이로비에서 사막지대를 데려다주는 조종사가 있었는데 시카고에서 왔대요. 파일럿 선교사인데 아프리카가 좋아서 여행 왔다가 그냥 지낸다는 거예요. 그 사람과 제가 오래도록 좋아했던 생텍쥐페리의 이미지를 섞어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창조해낸 거죠. 저는 그런 게 너무 재미있어요. 역시 끊임없이 이별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고요.

 

이별과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러 인물이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찾아 헤매요. 후회라는 감각이 많거든요. 왜일까요?


저는 한 마디로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후회하는 존재라는 건데요. 그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와 선택 사이에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후회의 감정을 많이 다루지 않았을까 싶어요. 후회하는 인물들은 꼭 나의 모습은 아니고요. 내 주변에 있었던 내가 수없이 보아왔던 인물들의 모습일 거예요.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보는데요. 특히 영화 속에서 본 수없이 후회하는 사람들이 저장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결국 제 소설의 핵심은 살아있음, 살아 있는 날 동안 나를 떠난 것들과 내가 보낸 것들에 대한 명상이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이 소설들은 ‘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되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보다 과정 그 자체를 깊이 사색해요. 여기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내게 예술은 순간을 박제하는 작업이죠. 순간이 결국 영원이었던 순간들을 햇빛 속에 드러내는 작업이랄까요. 그게 삶이거든요.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면허를 따기 위해 바쁘거나 성공을 하기 위해 애쓰거나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에요. 남는 장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웃음) 그것은 제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유형과도 비슷해요. 문학 취향이나 사람 취향이나 다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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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유효기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게 죽음이죠. 그 많은 죽음들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성찰하게 하거든요. ‘살아있다는 건’이라고 하면서 긴 호흡으로 말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기도 하고요.


이 나이쯤 되면 굉장히 많은 죽음을 보게 돼요. 그것도 갑작스런 죽음이죠. 어제 같이 밥 먹었는데 오늘 죽었다는, 이런 것들을 많이 겪게 되는데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극복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요즘도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면 굉장히 오랫동안 우울하고 슬픈 생각이 드는데요. 특히 형제란 아주 가깝고도 먼 애증의 상대죠. 형제의 어떤 부분을 너무 싫어했다 해도 사실은 그것이 나의 어떤 부분이었던 거죠. 싫어했던 부분이 내 어떤 부분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는데 그 애는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그러다 어느 날 네가 나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한 생각들 역시 글에 많이 섞여 있어요.

 

살아 있다는 건 해가 뜨는 걸 바라보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해가 지는 걸 바라보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온 감각으로 음미하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저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바람과 비와 눈을 맞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아무리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매일의 일상보다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그 일상 속에서도 과거는 힘이 없다. 하지만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227쪽, 「바오밥 나무를 좋아하세요?」)

 

종교적인 면도 있는데요. 저는 무신론자에 가까워요. 죽은 사람을 조용히 애도하고 싶은데 과도한 종교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에서 나를 일으킨 것은 불교적인 것들이었어요. 굳이 종교로서의 불교라기보다는 경전으로 읽은 불교적 마인드가 이별의 순간에 큰 위안이 되었던 건 사실이에요.

 

불상을 그린 그림도 곳곳에 있잖아요. 


동생이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실은 그것은 불교 이미지를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어떤 깨달음 때문이었어요. 동양의 보물은 붓다잖아요. 조각상으로써 말이에요. 그런 것에 관심을 갖다가 그린 거예요. 한 번은 다큐 프로그램을 따라 스리랑카를 다녀왔어요. 불교에 관한 모든 것을 본 거죠. 당시에는 너무 많이 봐서 지긋지긋하기도 했는데요.(웃음) 그 뒤부터 불상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요즘에는 한국에 있는 반가사유상이 제일 좋은데 왜 이게 나중에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예술적 형상에 매료된 상태예요. 종교적 의미에서의 불교라기보다는 내 안의 불교죠.  

 

예술적 의미에서 불교는 어떤 영감을 주나요?


제가 그리는 붓다는 인간 붓다예요. 보석처럼 빛나는 내 안의 붓다, 우리 안의 붓다를 사랑해요. 진짜로 내 안에 붓다가 있거든요. 가끔 만나지기도 하고요.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 너무 드문 것, 보석 같은 것, 그런 마음이에요.

 

다시 죽음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다양한 죽음을 보는 것 자체가 삶을 더 깊이 성찰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죽음은 다른 게 아니고 유효기간이라고 생각해요. 여행을 가서 돌아올 날짜 즉, 유효기간이 없다면 그렇게 열심히 안 볼 거예요. 원고 마감일이 있어야 쓰잖아요.(웃음) 그런 느낌으로 늘 생각하면서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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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색깔이 다른 화양연화


한편 에필로그에서는 작품들을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셨잖아요. 그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맨 처음 접한 짝사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에요. 짝사랑이 품고 있는 에너지는 인류를 발전시킨 에너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짝사랑은 반드시 남녀 간의 것이 아니더라도 해당이 되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도전하는 것도 짝사랑이잖아요. 이를테면 제가 어렸을 때 진짜 부러워했던 풍경은 피겨 스케이트를 타는 친구였어요. 얼음판 위에서 친구가 날아다니는 그 모습을 저는 짝사랑했어요. 또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치는, 저는 지금도 그 모습을 짝사랑해요. 대표적인 짝사랑은 어머니의 짝사랑이죠. 그것은 상대적일 수가 없죠. 절대고독, 절대사랑이잖아요. 그런 거예요. 한 사람만을 바라보다 죽은 개의 짝사랑,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한 짝사랑을 의미하는 거예요.

 

‘절대사랑’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어떤 감정은 읽는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남녀의 사랑을 다룬 소설 중 샨 사의 『바둑 두는 여자』라는 책을 좋아해요. 일본군 첩보장교와 중국인 독립군 여자의 이야기인데요. 여자는 이미 결혼을 했죠. 그 시절 상해는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끼리 바둑을 두는 풍습이 있었나봐요. 일본군 장교는 바둑을 두면서 그녀를 짝사랑하게 돼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가고, 나중에 여자가 독립 운동을 하다 붙잡혀서 일본군 주둔지로 붙잡혀와요. 그녀가 갇혀 있는 헛간 앞에 군인들이 강간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예전에 바둑을 같이 두던 그 남자가 앞장서서 들어가 그녀를 만나는 장면이 압권이에요. 사랑하는 그녀가 눈앞에 있는데 여자는 자기를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고 결국 권총으로 그녀를 쏴서 죽이는 게 마지막 장면이죠. 그런 것도 극단적인 사랑일 수 있다는 거죠. 저는 그런 이야기를 정말 좋아해요. 사실 진짜 사랑은 세월이 오래 묵은 사이에 드물게 발견되는 그런 게 아닐까요? 영화 <아무르>에서 처럼 말이에요.

 

‘내 삶의 화양연화였다’는 표현이 눈에 띄었거든요. 그 문장을 작가님께 드리면 어떨까요?


늘 지나고 나면 그때가 화양연화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죽을 때까지 늘 색깔이 다른 화양연화예요. 그러니까 늘 순간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오늘도 그렇고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죽는 날까지 그때가 화양연화였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그렇게 살아야 하고요. 산다는 게 사실 공짜 여행이잖아요. 긴 여행길에서 정말 구경 실컷 잘했다는 그런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듯 죽음도 그렇게 맞을 수 있다면 최고겠죠.

 

앞서 얘기한 후회라는 게, 결국 깨달음이기 때문에 후회인 거네요.


깨달음이기도 하고 욕심이기도 하죠. 놓지 못하는 거잖아요. 놓으면 후회할 일이 없죠. 저게 이것보다 낫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후회하는 거니까요. 사실은 그것조차도 살아 있기 때문에 드는 감정들 중 하나이겠고요. 결국 제 작품의 핵심은 살아 있음, 살아 있기 때문에 나를 떠난 것들에 대한 감상인 것 같아요.

 

화가가 아닌, 소설가로서 황주리의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까 말씀 드린 게 다예요. 그림은 직업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는 일이고요. 소설은 늦게 만난 나의 선택이고, 즐거움을 주는,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죠. 남녀노소, 시대를 불문한 소통이고요. 진짜 원하는 게 있다면 흔한 얘기 같지만 『어린왕자』 같은 이야기를 하나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것은 어쩌면 소설가의 글도 아니잖아요. 나중에 소설로 분류된 것뿐이죠. 나이가 들어도 사람들의 생각 속에 늘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를 남기는 게 꿈이에요. 어마어마한 꿈이죠.(웃음)

 

그림에 있어 소망하는 바도 같을까요?


맞아요. 앙리 마티스나 쿠사마 야요이처럼 대중에게 오래 사랑받는 작가로 남고 싶어요. 원화가 아니더라도 제 그림 달력이나 엽서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는 사람을 사랑해요. 위안이 준다는 말이 이제 너무 흔해졌지만 건 모든 게 다 위안이거든요. 그 안에서 나와 비슷한 절망을 발견해도 위안이고요. 어둠을 지나간 밝음도 있는 법이니까요. 제 꿈의 가장 큰 꿈은 사후에라도 황주리 미술관이 지어지는 거예요.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우울하고 슬픈 날에 찾아가고 싶은 그런 미술관을요. 어느 날 자살을 꿈꾸는 사람이 미술관 문을 열고 들어가 제 그림 앞에 서서,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미술관을요.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황주리 저 | 노란잠수함
화려한 원색과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 황주리는 평단과 미술시장 양쪽에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화가다. 이 책은 다양한 글쓰기로 뛰어난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 온 황주리의 기발한 상상력과 눈부신 색채로 가득 찬 매혹적인 그림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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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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