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 “생각하는 근육을 단련하는 과정”
기자 위근우의 서재
지식이란 무엇이 참이라는 것을 넘어 이것이 왜 참인가, 라는 구조화된 명제로서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언어로 분절화된 형태로 전달해주기에 책만한 게 없다고 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사주신 계림문고의 소년소녀문학전집을 읽으며 독서의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집중력 있게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이들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집중력 있게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이들 문고의 경우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삼국지』, 『해저 2만리』, 『대장 불리바』, 『장발장』 같은 소설들을 요약 및 번안했는데요, 덕분에 어떤 면에선 원작보다 더 스피디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독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다량의 정보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여전히 가장 좋은 매개체입니다. 물론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다양한 영상물도 다량의 정보와 지식을 전달할 수 있지만, 지식이란 무엇이 참이라는 것을 넘어 이것이 왜 참인가, 라는 구조화된 명제로서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언어로 분절화된 형태로 전달해주기에 책만 한 게 없다고 봅니다.
두 번째로는 뛰어난 문필가들의 문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수필뿐 아니라 인문학 및 교양서의 문체 중에도 탁월한 게 많습니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문제를 과감하게 돌파해내는 사유와 시원스런 문장도 좋아하고, 아도르노의 현란하고도 사변적인 문체 역시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재미없다고 하지만 하버마스의 차근차근 전제를 다져나가고 반론을 방어하며 논증을 강화하는 방식도 전 좋아하고요.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글의 스타일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큰 배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게 앞서 말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지만 지금 다시 펼쳐봐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몇 페이지만 읽어도 머리가 아프고 지금 이 사람이 펼치는 논리의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기 위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앞뒤 맥락을 살피고 몇 가지 가정을 세우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며 그 가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생각하는 근육을 키워줍니다. 전 그렇기 때문에 잘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책도 어쨌든 도전해보는 게 좋다고 보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저는 저널리즘으로서의 글을 쓰는 사람인데, 이건 결국 타인에게 최대한 오해 없이 정보와 지식과 생각을 전달하고 또한 설득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것이 이러저러해서 옳다 그르다라고 말하는 전제 자체를 무시하면 될 일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도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근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최근 더 자주 하고 있고요, 여기에 있어 저는 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버마스의 논변윤리와 형식 화용론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하버마스와 비슷한 문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길로 간 칼 오토 아펠에 대한 책 『칼 오토 아펠과 현대철학』, 그리고 대화 윤리를 이야기한 알브레히트 벨머의 『대화 윤리를 향하여』를 최근 구매했습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어요.
제 책 『프로불편러 일기』는 최근에 생긴 신조어인 ‘프로불편러’라는 개념을 빌려온 책인데요, 책 머리말에서 썼듯, 저는 이 표현이 신조어지만 결국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던 생산적 불편함에 대한 수식이라고 봅니다. 우선 예민함을 잃지 않아야 하는 저널리스트도 ‘프로불편러’여야 하고,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어울리는 뛰어난 지식인들도 있을 겁니다. 세상은 여전히 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품고 있고, 그것은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시사적인 현상에 비해 대중문화 안에 있는 많은 문제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될 때가 많은데요, 그런 식으로 어떤 차별적 태도가, 어떤 무례함이, 어떤 자기모순이 우리를 너무 쉽게 둘러쌉니다. 그것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불편하진 않지만 그래도 왜 본인은 괜찮은데 이거에 민감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한 번쯤은 ‘프로불편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면 좋겠습니다.
명사의 추천
느림
밀란 쿤데라 저/김병욱 역 | 민음사
제일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꼽을 수 있다면 아마 그만큼 독서량이 부족하단 뜻이겠죠. 그런 민망함을 무릅쓰고도 단 한 권을 고를 수 있습니다. 이 책 『느림』에서 작가는 항상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은 인간의 강한 자의식을 엄청 풍자적이고 노골적으로 묘사하는데요, 이 책을 보고 나면 나 역시 세상을 내 위주로 해석하고 있진 않은지, 남들의 행동 안에 그런 드라마틱한 욕구는 없는지 관찰하게 됩니다. 깔깔깔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 품위를 지키는 인간이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까지도 남겨주는 짧고 정말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진리와 정당화
위르겐 하버마스 저/윤형식 역 | 나남
앞서 말했듯 저는 하버마스의 철학에 관심이 많은데요, 그의 주저이자 사회학 분야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사실성과 타당성』보단 순수철학의 문제를 다룬 논문집 『진리와 정당화』를 더 재밌게 봤습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이 현대 사회 전체의 문제와 대안을 조망하는 거대한 기획이라면 『진리와 정당화』는 당장 사회 이슈에 연결되지 않아 보이는 철학의 질문들이 왜 그럼에도 중요한가 이야기해주는 책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상호주관성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더 나온 결과로 유도할 수 있는가, 그는 정말 차근차근 치밀하게 논증해갑니다. 하버마스가 『도덕의식과 소통적 행위』 중 한 챕터에서 이야기한 '자리 지키는 자로서의 철학'이 갖는 겸손하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바로 그런 '자리 지키는 자로서의 철학'을 확인할 수 있는 책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 저/이한음 역 | 사이언스북스
소위 '문과생'들이라면 문과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분야에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해주는 위대한 과학저술을 읽고 일종의 컬쳐쇼크를 받는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거라고 봅니다. 누군가에겐 『이기적 유전자』이고 누군가에겐 『빈 서판』일 텐데, 저에겐 사회생물학을 표방한 『인간 본성에 대하여』가 그러했습니다. 전 지금도 외계인이 볼 때 인간의 법, 제도, 문화는 결국 인간종에 대한 생물학으로 소급할 거라는 설명만큼 직관적으로 학문의 통섭을 보여주는 비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속한 인간종을 그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이 어떤 디폴트값으로 이뤄졌는가, 그것은 어떻게 제도화되고 또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굉장히 쉽고도 재밌게 설명해줍니다.
미니마 모랄리아
테오도르 아도르노 저/김유동 역 | 길
굉장히 우울해서 한 번 읽을 때마다 아주 진도를 많이 나가긴 어려운 책(물론 그냥 읽기 어렵기도 합니다)입니다. 유대인인 아도르노가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시기에 쓴 에세이들을 볼 수 있는데요, 아도르노 특유의 어떤 유토피아적인 이상에 기대지 않고 세상의 부조리와 불화하고 날카롭게 각을 세우는 글이 다수입니다.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양심적인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망명객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는 자본주의 안에서 평준화되는 문화에 조금의 찬사나 타협도 없이 비판의 칼날을 대고, 그럼에도 바뀌지 않을 세상 앞에서 '한 줌의 도덕'을 지켜 자기 삶의 양심만이라도 지키려 합니다. 저는 아도르노보다는 세상의 개선 가능성을 더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또 닮고 싶습니다.
머니볼
마이클 루이스 저/김찬별,노은아 역 | 비즈니스맵
아마 저를 비롯해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책 같은 저서 하나는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까요. 영화로도 만들어진 『머니볼』은 가난한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이 시장의 어떤 틈새를 파고들어 리그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는지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재밌는 논픽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보기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단순히 세이버매트릭스 접근법이 옳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공유하는 세상의 관습 안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는지, 그리고 그 허점을 읽어낼 수 있는 이들의 통찰을 통해 게임의 룰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자기가 속한 다양한 분야에서 '머니볼'을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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