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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떠났어요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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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같은 모습도 잠시, 엄마는 떠나는 전날까지도 분주했다. 한 달 간 먹을 수 있는 마른반찬, 볶음밥 재료, 얼린 국 등 반찬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여행의 매력은 낯선 곳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이국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해외여행의 경우, 저가 비행사들의 호황으로 비용에 대한 부담도 적어졌다. 또 일상이 팍팍할수록 ‘여행이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지고, 이왕 갈 거 해외여행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경기는 불경기라고 하는데 공항에 가면 넘쳐나는 사람들이 그 반증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탈탈 털어 3명뿐인 가족 중 ‘엄마’가 해외여행을 떠난다면? 여행의 매력은 잠시 잊힐 것이다.


엄마의 해외여행은 딱 한 번 있었는데, 작년에 떠났던 뉴질랜드 여행이다. 뉴질랜드행의 목적은 분명했는데, 30년 지기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 아빠와 너보다도 오래 알고 지낸’) 민정 이모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엄마는 같은 여행을 떠났다.


엄마의 여행은 항상 반짝반짝 빛나고, 새로움이 가득한 것 같다. 캐리어에 옷만 챙기는 나와 달리, 엄마의 캐리어는 친구를 위한 선물과 책이 빠지지 않는다. 고추장이나 김치도 없다. 혼자 오클랜드에서 타우랑가까지 이동해야 할 텐데, 두려움도 없다. 친구와 어떤 추억을 쌓을지 계획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아빠와 나까지 즐거웠다.


사진1.jpg
새로 산 캐리어에 내가 써준 네임택


그런데 소녀 같은 모습도 잠시, 엄마는 떠나는 전날까지도 분주했다.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마른반찬, 볶음밥 재료, 얼린 국 등 반찬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사실 엄마의 여행 소식을 듣고 쿨하게 다녀오라 말했지만, 찬거리 걱정이 됐던 게 사실이다. 또, 아빠를 잘 챙겨드려야 엄마의 여행이 편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의 준비를 보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떠나기 전까지도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에게 죄송하기도 했다.


사진2.jpg
엄마의 메모


엄마는 예정대로 출국했고, 나의 일상에는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출근 전에는 어느 반찬을 먹으면 되는지, 버려야 할 쓰레기가 무엇인지, 사다 놓아야 할 물건 등을 쪽지로 남기기도 한다. 퇴근길에는 저녁을 고민하고, 자기 전에는 내일 아침 반찬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아빠가 저녁 다 드실 때까지 옆에 앉아있기도 한다. 음식 빼고 모든 집안일에 적극적인 아빠기 때문에, 아빠를 탓할 수도 없다. 설거지도 청소도 분리수거도 안 하는데, 엄마가 준비해놓은 반찬을 해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내 여행과 달리 엄마의 여행에는 설렘과 걱정이 담겨있다. 떠나기 전에는 절친한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설렘, 그리고 떠나고 난 후에는 당신 없이 지낼 가족들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식 다 키워놓고 떠나는 여행이라 즐거움만 가득할 수도 있다) 여행하는 동안은 훌훌 털고 즐겁게, 지난 여행보다 더 많은 곳을 누비고 오시면 좋겠다.


사진3.jpg
망가누이 해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엄마’분들이 걱정하실까 봐 덧붙이는데, 아빠와는 평화롭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준비된 음식을 야금야금 먹으며 말이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전혜린의 문장을 소개한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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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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