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오늘따라 쉼표가 내게 말을 건넨다

난주 『문장부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오늘따라 쉼표가 내게 말을 건넨다. 쉬어도 좋다. 삶은 점의 연속이니까, 점이 선이 되길 기다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니까 지금은 잠시 쉬어가도 좋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안녕하기로 한다.

꾸미기_photo_11.jpg

 

2003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나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 화가의 그림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화가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찾아보니 화가는 싸이월드와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 중이었다. 현재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말에, 짤막하게 가겠다고 방명록을 남기고 찾아갔다. 그렇게 만난 화가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도 화가가 내게 건넨 말을 기억한다.

 

“내 그림에서 튀어나온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2년간 우울증을 앓았다. 몸무게가 계속 줄어 뼈밖에 남지 않았다. 척박해진 삶을 달래려고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머리카락과 나를 지치게 만든 것들을 모두 쓸어내리려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던 길이었다. 그런 내게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붉은 머리의 개구쟁이 같은 숏컷이 나와 닮았다고 말했다. 그 한 마디가 오랜만에 내 인생에 쉼표를 찍어주었다. 화가를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으나 이상해 보일까 봐 참았다. 대신, 내가 반한 그림과 화가를 함께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나의 절망을 해맑음으로 달래준 그녀가 스타가 되길 바랐다. 내 소망은 이뤄졌다. 그 화가는, 육심원이다.

 

나는 그 후로도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만나면, 훗날 그 분이 엄청나게 유명해진다. 최근에도 이런 감탄으로 한 화가를 제 발로 찾아가 만났으니, 뜨개질이 취미인 친구 한 명이 월차까지 내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뛰어나간 날이었다. 이 날, 나는 화가 난주를 만나러 홍대 앞으로 향했다.

 

우리가 촛불로 광장을 물들였듯 화가 난주는 색색의 점을 펜촉으로 찍어 그림을 그린다. 코앞에 갖다 대고 그림을 보면 점이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그림이다. 한 장 한 장 그림마다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가 숨어 있고, 그것들은 각기 씨앗이 되었다가 피어 오르는 꽃이 되었다가 개미가 몰고 다니는 씨앗으로 탈바꿈했다가 마침내는 나비로 변한다. 이윽고 하늘을 나는 나비들 아래로 흐드러지게 제비꽃이 핀다. 꽃잎 사이사이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인간들처럼 다양한 문장부호들이 각기 그 자리에서 제 책임을 다 하기에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꾸미기_photo_9.jpg

 

화가는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줬다. 펜을 몇 개고 골라 꺼내기에 뭘 쓰려고 저러나 봤더니, “작가님은 제가 특별히 개미를 두 마리 그려드릴게요.”하고는 낙관 찍듯 개미 두 마리를 그린다. 천천히 잇는 볼펜의 선이 감사하기 짝이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인터넷에서는 대통령 탄핵소추안 이야기가 연달아 나왔다. 나는 그 뉴스를 눈으로 훑다가 한숨을 깊게 내쉰다. 대신 화가의 책 『문장부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기로 한다. 각각의 문장부호들 중 어쩐지 쉼표에 한없이 눈길이 가서 손가락으로 쉼표를 쓸어본다.

 

오늘따라 쉼표가 내게 말을 건넨다. 쉬어도 좋다. 삶은 점의 연속이니까, 점이 선이 되길 기다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니까 지금은 잠시 쉬어가도 좋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안녕하기로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8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조영주(소설가)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

문장부호

<난주> 글그림10,800원(10% + 5%)

작가의 땀과 수고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점묘화 『문장부호』의 그림은 점묘화로 그렸습니다. 붓으로 넓은 면을 칠하는 대신 작은 점을 하나하나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품이 많이 들고, 점의 크기나 간격의 작은 차이에도 형태와 명암이 달라지기 때문에 펜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고된 기법이지요. 나비의 솜..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마음을 전하는 ‘백희나’표 마법

“사랑해!”나 “나랑 같이 놀래?”는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한 마디가 된다. 이 책은 마법의 알사탕을 통해 이런 말들을 전할 용기를 심어준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그림책 작가 백희나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신작 그림책.

2016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

한 명의 여중생이 경험하는 일상이자 생활의 단면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장 간단한 그림으로 현실을 드러내고 위로한다 왕따, 가정폭력, 게임중독, 학원폭력, 외모지상주의, 인터넷 신상 털기 등 우리 사회의 민낯을 주인공 ‘장미래’의 고민 속에 담담하게 녹여내고 있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는 없다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 진화심리학자들은 여전히 많다. 성 차이에 대한 결정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반대로 이미 이념적이다. 저자는 젠더 프로파일링의 허점을 폭로하며, 그간 진실이라 믿었던 성 고정관념이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증명한다.

오쿠다 월드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의 치명적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스페셜 작품집. 코믹한 글부터 사회 비판적인 내용까지, 다양한 시기에 발표된 단편 6편과 콩트, 대담 2편을 엮었다. 새로운 오쿠다 월드에서 '이야기의 제왕'으로 불리는 그의 변화무쌍한 진면목을 만난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화제의 공연
KALI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