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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은 역시 먹는 것

대만 타이베이, 타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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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여보. 내 짐도 좀 내려 주지 않겠소? 식기세척기 한 대 놓으면 손에 습진이 사라질 듯 하오만....

부엌에서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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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을 것 앞에서 기다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대만인들.

 

오래전부터 서로의 속도에 찬찬히 발을 맞추어 온 듯한 손을 꼭 잡은 노부부의 뒷모습이 유독 많이 보였다. 대만에서 만난 인상적인 풍경이다. 서로를 다정하게 챙기는 노부부의 배려심이 젊은 연인의 달콤한 속삭임을 대신해 거리를 가득 채운다. ‘황혼이혼 30% 시대’라는 불명예의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 아닌 게 분명한 이들의 소박한 애정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 이유는 뭘까?’ 대만이 세 번째라는 그 남자도 신통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걸 보니 나라도 머리를 굴려 봐야겠다. 20년 이상 유지된 혼인 관계가 해소되는 상황을 일컬어 ‘황혼이혼’이라고 한다.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기에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친구’이자 ‘삶의 가장 많은 깨우침을 안겨주는 스승’이자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연인’인 서로의 배우자에게 안녕을 고하게 되는 걸까? 그 이유를 부엌에 갇혀 지내지 않는 대만인과 연결해 보면 심각한 비약일까?

 

타이베이台北에서 한 달, 타이난台南에서 한 달을 보내는 동안 숙소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없었다. 미니 전기밥솥까지 들고 다니며 하루에 한 끼는 밥을 해 먹는다는 원칙을 거스르게 된 여러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 부엌의 활용도가 떨어지거나 부엌이 없는 경우였다. 더운 나라의 특징상 집 안에서 음식을 안 해 먹는 건 일반적이다. 그런데 대만은 6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을 제외하면 긴 팔, 긴 바지가 필수일 정도로 아열대 기후라고 하기에는 기온 편차가 심한 편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 타이베이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더위에 놀라는 이유는 이곳이 대만에서도 가장 더운 분지라는 사실을 모를 경우다. 추측 건대 대만 날씨가 현지인의 부엌 활용도를 떨어트린 절대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대만인은 삼시 세끼를 바깥에서 사 먹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데 어쩌면 날씨보다 값싼 식비가 부엌으로부터 해방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한국 돈으로 1~2천 원 정도면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고 그 종류나 맛의 퀄리티도 흠잡을 데 없다. 아침은 샌드위치나 꽈배기 모양처럼 길쭉한 밀가루를 튀겨 만든 ‘요우티아오’를 ‘또우장’(두유)과 함께 먹는다. 대만에는 조식만 파는 가게들도 꽤 많다. 다른 한 끼를 두둑이 먹기 위해선 아침보다는 두 배가량의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가격 대비 양을 생각한다면 서운함은 금세 사라진다.

 

누구나 손쉽게 싼 가격에 음식을 먹게 되면서 부엌의 역할은 차츰 감소하고 ‘누가 누구의 밥을 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된 게 대만 노부부의 가정의 평화와 더불어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닐까? 물론 여기에는 ‘여성도 하늘의 반쪽을 들 수 있다’는 중국의 속담처럼 대만의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가 평등하게 올라선 이유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결혼을 하면 맞벌이 부부라고 할지라도 여자가 남자의 밥을 매번 챙겨줘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거나 그것을 벗어난다 해도 일말의 죄책감을 껴 안고 살아야 한다. 여자가 부엌에서의 해방을 성취했을 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결혼 후, 행복한 20년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사이 좋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힘 아닐까? 그 남자가 일찌감치 나를 부엌에서 떼어 놓은 건 참말로 잘한 일이다.

 


요리는 배고픈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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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배고픈 사람이 하는 것 아닌가?

 

대만의 다양한 모습을 열심히 알리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 이곳은 무엇보다 식도락이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들, 몇 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음식점, 가판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간식거리까지. 인간의 욕구 중 섭식攝食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들의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시 먹는 것이었고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입으로 넣었다.

 

그중 이틀이 멀다 하고 찾은 곳은 숙소 1층에 위치한 만둣가게다. 그동안 수많은 만두 찜통을 열었지만 이 집에는 세상 어디에도 맛본 적 없는 풍부한 육즙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밀가루 반죽을 두드려 만두피를 펴고, 고기와 야채를 갈아서 만두소를 채운 정성이 찜기 안에 가득 차 있다고나 할까? 다만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영업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나와 같은 열정적인 뜨내기 고객도, 수십 년을 찾은 단골도 셔터 내려진 현관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야 한다.

 

대만의 식당들은 영업시간이 독특했다. 아침 식사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은 점심 전에 문을 닫고 일반 음식점들은 퇴근 시간 즈음이면 그 날 영업을 끝낼 채비를 한다. 9시 이후에는 뭐라도 먹으려면 야시장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 만둣가게 시간 맞추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판에서 산 간식거리를 걸으며 먹는 사람들, 스쿠터의 핸들에서 달랑거리는 포장 음식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에게는 부엌에서 요리해 먹는 것보다 밖에서 사 먹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대만의 풍경 속에서 살다 보면 ‘매 끼니를 밖에서 사 먹어도 되는구나’ 싶어지고 누군가 꼭 주방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여자의 표현을 빌자면 대만의 여성들은 ‘부엌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그들을 구속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런가?’라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가족의 ‘삼시 세끼’를 외식으로 대체하면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유교적 관점의 여성상에 비춰보면 그리 여겨질 수도 있겠다. 단골 만둣집 주방을 비롯해 대만의 식당 주방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주방은 여전히 이모들 차지인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한식당에 비밀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성 역할에 옥죄인 한국의 주방 문화’이란 생각이 든다.

 

뭐든 쓱쓱 썰어서 프라이팬에 볶거나, 냄비에 넣고 끓이는 것도 요리라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렵지 않게 주방에 설 수 있다. 반면 그 여자는 주방이라는 공간에 거부감을 보였다. 요리할 때마다 그녀가 마음을 다치는 게 싫어서 ‘그럼 주방은 내가 맡을게.’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자진해서 요리를 한다. 그저 당신이 힘겨워하는 공간에 나는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으니 합리적으로 역할을 나눈 것인데 그 말 한마디가 주방에 대한 거부감이 가셨나 보다.

 

“그나저나 여보. 내 짐도 좀 내려 주지 않겠소? 식기세척기 한 대 놓으면 손에 습진이 사라질 듯하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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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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