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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통해서든 행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박애’를 느끼는 이탈리아 아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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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골이 도난당할까 봐 정확한 무덤의 장소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것은 성자의 유해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있지만, 성자의 유골이 있는 유명한 순례지에서 축적할 수 있는 부유함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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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의 푸른 심장이라 불리는 움브리아주의 수바시오산 비탈에는 작지만 큰 에너지를 뿜어내는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있다. 움브리아 평원을 한참 달리다 보면 산 위에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천상의 마을. 어떤 수식어가 더 필요할까. 성자 프란체스코의 발자취가 구석구석 새겨진 그곳은 바로 아시시.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면 소란스럽던 마음은 어느새 자취가 없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한참을 평온한 기운에 나를 담가두었다.

 

몇 년 전, 로마로 이동하는 중에 점심을 위해 잠시 들렀을 때 나는 머지않은 때 다시 이곳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동차에서 본 하얀 마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들렀던 작은 마을이었다.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에 내 여행의 피로와 긴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풀어져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시시는 조용히 산책하거나 한가롭게 배회하기에 좋은 마을이라는 것을 걸을수록 느꼈다. 좁고 가파른 골목길과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집 사이로 보이는 아시시의 평원은 보이는 곳마다 그림 속 한 장면이었다. 골목골목 오랜 전통의 맛집들이 뽐내거나 자랑하는 일 없이 숨어 있으며 빛바랜 프레스코화는 쌓인 시간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자리를 떠야 했던 지난 여행에서 나는 이미 다음 여행지의 핵심 포인트로 아시시를 적어두었다.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아시시가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성자 프란체스코 때문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아시시의 부유한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체스코가 부친을 대신해 시장에서 옷감과 직물을 팔고 있을 때 걸인 한 사람이 구걸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장사를 멈추고 걸인을 쫓아가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모든 돈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 그런 자선 행위를 본 친구들은 그를 비웃었고 집으로 돌아간 프란체스코는 화가 난 부친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아마 이때부터 방탕한 삶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나누는 삶에 대한 마음이 생겨난 것 같다.

 

1205년 프란체스코는 페루자 정복을 위한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프란체스코가 길을 가던 중 스폴레토에 있을 때에 환시를 보게 되는데, 수많은 갑옷과 무기가 있는 방 안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주인을 섬기겠느냐? 아니면 종을 섬기겠느냐?”는 물음에 “주인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응답하자 아시시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대로 아시시로 되돌아갔다.

 

아시시로 돌아온 후로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은 물론 친구들과의 연회 참석도 피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친구들이 그에게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그는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검소한 삶이 지닌 미덕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시시 인근에 있는 나병 환자들을 수용한 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을 간호했다.

 

프란체스코는 이후 로마를 비롯한 성지를 순례하고 아시시로 돌아가던 길에 아시시 교외에 있는 산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환시를 다시 체험하게 된다. 기도하던 중 십자가상의 예수로부터 “프란체스코야, 프란체스코야.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수리해다오.”라는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는 즉시 부친의 가게에서 값비싼 옷감들을 가져다가 시장에서 싸게 팔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리려고 갖은 시도를 하였지만,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프란체스코를 도시 집정관들에게 데려가 프란체스코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판이 열렸는데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상속권은 물론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심지어 대중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과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부친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아시시 지역에서 몇 달간 구걸로 연명하며 아시시 인근의 폐허가 된 성당들을 재건하는 일에 매달렸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받은 상처와 같은 모양의 다섯 개의 상처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훗날 더욱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세상으로부터 얻고 남은 것은 나눌 수 있어야

 

산타 키아라 성당에서 조금 걸으면 코무네 광장에 이른다. 광장에는 장중한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 여섯 개가 떠받치고 있는 미네르바 신전이 있어 여행객들의 시선을 한참이나 붙잡는다.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이 고대 로마 신전에서는 우아한 품위가 느껴졌다. 마침 광장을 가로질러 마치 그 옛날 프란체스코처럼 허름한 수도승 복장을 하고 맨발인 남자 여럿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편안한 신발을 신고 두꺼운 옷을 입은 내가 스스로 불편해졌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일순간에 버리고 오로지 신념만을 위해 살아갈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선택할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없는 중에 한두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이다.

 

눈으로 프란체스코를 닮은 순례자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살펴봤다. 거침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에 저절로 숙연해졌다. 순례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몸이 굳어버린 듯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록 모든 것을 버린 성자는 될 수 없어도 최소한 자신의 삶에 부끄럽지 않고 부족하지 않을 만큼 얻고 남은 것은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프란체스코 거리를 따라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향했다. 겨울인데도 어느 도시보다 유난히 많은 순례자와 수도자, 수녀들이 조용히 골목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프란체스코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은 일반 여행자들에게도 마음의 평안과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부여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안에는 <작은 새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를 비롯해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그린 본도네의 벽화 28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복층으로 구성된 바실리카양식의 지하묘지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느끼고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려 노력했는데 그가 묻힌 곳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교회 중 하나라는 사실은 사뭇 아이러니하다.

 

프란체스코는 죽은 지 2년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데 공식적인 장례도 치러지기 전이었다. 그는 지옥의 언덕이라 불리는 콜레 델 인페르노에 있는 빈민의 무덤에 묻히기를 바랐지만, 자신이 산 프란체스코의 거대한 교회당 안에 모셔지리라고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이후, 그의 유해는 새로 지은 성당인 성 프란체스코에 안장되기 전까지 산 조르조 교회에 있었다. 그의 유골이 도난당할까 봐 정확한 무덤의 장소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것은 성자의 유해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있지만, 성자의 유골이 있는 유명한 순례지에서 축적할 수 있는 부유함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아픈 새벽, 서늘한 가슴-캔버스에 아크릴-72.7cm x 50cm-2014.jpg
 

“나는 신성하지 못한 모든 존재를 겪어 왔다. 만일 신이 나를 통해 행하신다면, 그분은 누구를 통해서든 행하실 수 있을 것이다”

 

체호프는 말했다. ‘고독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독이 두려우면, 여행하지 마라.’
- 폴 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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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흔들리지 않아배종훈 저 | 더블북
책에는 저자가 직접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도시들 풍경과 역사, 사유가 노트북 자판기를 꾹꾹 두드려 쓰였으며 원색적인 색감의 붓칠로 그림들이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여행지의 파란 하늘을 모티브로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가 들리는 듯한 풍광 사진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텅 빈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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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배종훈

서양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여행 작가, 그리고 중학교 국어교사라는 1인 5역을 맡아 늘 바쁘게 살고 있다. 서른여섯에 처음 간 유럽에 완전히 중독되어 거의 매년 유럽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돌아와 전시를 열었다. 요즘에는 여행 드로잉 비법을 전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일본과 인도 등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그림과 글을 쓰는 일도 준비 중이다.

이젠 흔들리지 않아

<배종훈> 저12,6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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