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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성석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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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들 중 20년 넘게 사랑 받아 온 단편들을 모은 선집이다. 대학 시절 달달 외다시피 했던 그의 단편을 세월이 이만큼 지나 다시 읽는 기분이 어떨까, 혼자 궁금해 얼른 주문을 했다. 이건 흡사 첫사랑의 안부를 묻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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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백일을 맞았을 때 시댁 가족들이며 친정 가족들이 금반지와 팔찌 등을 잔뜩 선물해주었다. 앙증맞기 짝이 없는 그것들을 보며 내가 까르르 즐거워하자 엄마가 한 마디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애기 반지 같은 건 팔아먹지 마.” 나는 펄쩍 뛰었다. “이걸 왜 팔아?” “그러니까. 팔 생각은 하지도 마.”

 

사실 엄마는 팔 거 다 판 사람이었다. 지지리 가난한 구멍가겟집 맏아들과 결혼한 엄마는 아빠의 월급봉투를 만져보지도 못했다. 경월소주와 라면들, 식용유와 곰표 밀가루 같은 것들이 많지도 않게 쌓여있던 구멍가게 들창으로는 매일매일 사나운 바닷바람이 들이쳤고 소금꽃 앉은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는 아빠의 월급봉투를 야무지게도 가로챘다. 돈 한 번 벌어본 적 없는 한량 시아버지와 시동생 둘, 시누이까지 밥을 다 해먹여야 했기 때문에 엄마는 우체국을 그만두었다. 골이 났지만,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았던 엄마는 바닷가 마을에서 제일 잘 생긴 청년과 결혼을 한 대가려니 생각하며 묵묵히 일을 했다.

 

큰 시동생은 엄마에게 자꾸 심통을 부렸고 시누이는 얄밉기 짝이 없었지만 겨우 중학교 1학년이던 막내 시동생이 그나마 귀여운 짓을 많이 해서 엄마는 참을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밥을 푸면 꼭 큰 시동생이 돌을 씹었다. 큰 시동생, 그러니까 나의 작은아버지는 나이가 든 후 우리 자매들을 앉혀두고 걸핏하면 그때 이야기를 했다. “니네 엄마 때문에 내 어금니가 두 번이나 깨졌어. 아주 작정하고 돌을 넣지 않고서야 어찌 그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지만 엄마는 그게 고소해서 밥상을 다 치운 후에도 부엌에서 혼자 웃었다.

 

결혼을 하고 시아버지의 첫 생일이었지만 엄마에게는 생일 선물을 준비할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근처에 사는 사촌 형님네를 찾아가 돈을 꾸려 했지만 “결혼반지는 뒀다 삶아먹을라고?” 라는 말에 결국 반지를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시아버지의 스웨터를 샀다. 여고생 시누이가 까불까불 나섰다. “아부지! 아부지는 이런 거 안 좋아하시잖아. 이거 가져가서 내 껄로 바꿔오면 안돼요, 아부지?” 한 성깔 하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그 꼴을 보고 아무 말 안 했는지는 여태 의문이다. 결국 여고생 시누이는 그 길로 스웨터를 들고 나가 제 겨울 코트로 바꿔왔다. 지금은 일본에 사는 시누이, 즉 우리 고모는 종종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 내가 과자 좀 보냈어. 손주들 나눠줘요.” 하곤 하는데, “아이고, 미칬나. 귀찮을 텐데 뭘 그런 걸 다 보내고 그래!” 해놓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드런 년, 내 결혼반지도 홀뜨락 해먹은 주제에 꼬질랑 과자 몇 개 보내고 앉았네.” 그러면서 신경질을 냈다.

 

외할머니는 결혼반지조차 없는 엄마가 안쓰러워 당신의 금반지를 하나 물려주었다. 그건 막내 시동생이 해먹었다. 대학등록금 때문이었다. “맏메누리가 등록금도 안 해주니 어떡하나. 등록금도 없는데 고마 이놈의 새끼, 머리 깎이가꼬 절이나 보낼란다.” 하며 통곡을 하는 바람에 엄마는 반지도 내다팔고 일수돈까지 빌렸다. “야, 내가 막내 등록금 4년 내내 다 내주고, 지 색시 다이아반지까지 해줘 가며 결혼도 시켰어. 그런데 니 결혼식 때 부조를 겨우 요따위로 해? 지가 양심이 있어, 없어?” 엄마는 내 결혼식 때 막내 작은아버지가 축의금으로 30만원밖에 내지 않았다고 길길이 화를 냈다.

 

“니들 돌반지 같은 건 언제 팔아먹었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나.” 엄마는 오랫동안 반지 없는 여자로 살았다. 이게 다 열일곱 살 엄마의 첫사랑 때문이었다. 열여덟 살 시인지망생 아빠가 너무 잘생긴 남자여서 벌어진 일이었다.

 

성석제의 신간 『첫사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다. 성석제의 소설들 중 20년 넘게 사랑 받아 온 단편들을 모은 선집이다. 대학 시절 달달 외다시피 했던 그의 단편을 세월이 이만큼 지나 다시 읽는 기분이 어떨까, 혼자 궁금해 얼른 주문을 했다. 이건 흡사 첫사랑의 안부를 묻는 심정이다.


 

 

첫사랑성석제 저 | 문학동네
『첫사랑』은 ‘성석제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왜 성석제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로 꼽히는지 입증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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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첫사랑

<성석제> 저12,600원(10% + 5%)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파격과 품격, 성석제의 초기 걸작 단편들 “네 손길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부드럽고도 질기고 단호한 힘이 들어 있었다. 그건 사랑에 빠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6년, 소설가 성석제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정식 등단 절차도 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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