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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부끄럽고 참담하다'는 자성에서 그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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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들은 또 다른 ‘나 자신’이 울부짖는 음성으로 읽혔다. 어느 기사에서는 폭로전이라고 보도했지만, 글들은 ‘폭로’라기엔 처절하고 아파서 오래 읽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생존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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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16년 광주 비엔날레를 다녀왔다. 이번 광주 비엔날레의 타이틀은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The 8th Climate: What does art do?)라는 주제를 잡고 진행했다. 1~5관, 그리고 광주 곳곳에서 진행되는 비엔날레를 1박 2일 동안 살펴보며 주제를 곱씹었다. 미술은, 아니, 예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2 전시관의 깜깜한 암실에서 오래 뉴미디어 작품들을 보면서 재차 물었다. 그 속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작품도 있었고, 난개발을 비판하는 작품도 있었으며, 개인적?사회적 폭력을 다룬 영상도 있었다. 용산행 KTX를 타고 올라오면서 나는 한 문장을 기억해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다.” 내가 광주에서 보았던 몇몇 작품들이 저 문장에 꿰어졌다.


그리고 1주일이 흘렀다. 나는 다시 위 문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 문장을 쓰기까지 괴로웠다. 지난 일주일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 기대는 - 문장은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구호이다. 저 구호를 외쳤을 약 40년 전의 여성들을 떠올렸다. 2016년의 우리는 얼마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 쉽사리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여러 일을 ‘개인적인 것’이라며 묻어버리고 감췄던 노력이 결국 '정치적인 것'으로 떠오르고 말았으니.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쓰고, 읊는 문단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내가 배워오고, 읽어왔고, 지지해왔던 문학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그동안 예술은, 아니 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주 금요일 아침, 조심스럽지만 몇 번이고 고쳐 썼을 언어들이 SNS에 올라왔다. 처음 시작은 이대로 끝나나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다른 글이 올라왔다. 고백들의 시작은 이러했다. “OO님의 고백에 용기를 얻어” 이어지는 타래는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가해자들의 책들을 죄다 버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주말 내내 SNS를 지켜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도 피해자들과 똑같은 여성이었고,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고백들은 또 다른 ‘나 자신’이 울부짖는 음성으로 읽혔다. 어느 기사에서는 폭로전이라고 보도했지만, 글들은 ‘폭로’라기엔 처절하고 아파서 오래 읽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생존신고였다.


그렇게 ‘#OO계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한 생존신고가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내가 아는 이름도 있었고, 모르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주체가 누가 되었든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끔찍하고 잔인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들과의 권력관계에서 한없는 약자였다. 습작생이었거나 편집자, 혹은 글을 동경하는 독자였다. 가해자의 언어를 사랑하고 아껴주었을 사람들. 그리고 문학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었다. 가해자들은 그런 피해자들을 속박하고 명예를 내세워 입을 열지 못하도록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건 자신들인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협박은 당연한 옵션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계속되는 ‘생존신고’보다 더 놀라웠던 건, ‘터질 것이 터졌다’라는 반응들이었다. 그간 풍문으로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못 본 체했던 것일까. 어떤 한 작가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굳이 바깥으로 꺼내고 공론화하고 싶지 않았을까. 피해자들은 보이지 않는 그 ‘뚜껑’을 열기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감당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이 끔찍한 일을 발설함으로써 이어지는 외면을 목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피해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반응일 터이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2016년이 되면서 올해는 페미니즘 언어가 중요해지는 기점이 될 거라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을 지경이니.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언어의 가시화는 여러 언론에서 다뤄졌고, 출판사들이 때를 맞춰 많은 책을 내놓았다. 서점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페미니즘 도서들이 베스트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변해가고 있다고 믿었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썩은 고름’은 아직도 우리 안에서 박혀 곪아 가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몇몇 사람들조차도 가해자였거나 동조자였거나 묵인하며 입을 다문 방조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침묵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어떤 불편한 경험에서조차도 침묵하고, 그럼으로써 감각이 무뎌지고, 나중에는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분명히 그랬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내 무감각을 거둬주고, 동경해왔던 곳의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힘을 실어주며 연대를 구축할 때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은 단순한 단발성 폭로전이 아니다. 오랫동안 감춰온 일이 드디어 공론화되었다. 어떤 권력관계에서 피해자의 눈물을 방관하거나 묵인하고 넘어갔던 문화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변화할 수 있겠는가. 문단 내 구성원들이 끊임없는 관심과 지지로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연대하여야 우리는 온전하고 동등한 개개인들이 이루는 건강한 문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제서야 가해자들은 반성문, 사과문 등을 써내고 있다.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피해자들의 뼈아프고 절박한 글들에 비하면 간결하고 정리된 글자들의 나열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온도가 무척 다른 두 가지의 글을 번갈아 보며 더욱더 이곳의 변화를, 여러 목소리를 갈망하게 된다. ‘부끄럽고 참담하다’라는 자성에서 그치지 말고, 새로운 목소리들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내가 배워오고, 읽어오고, 꿈꿔왔던 문학이 그랬듯이.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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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유리(문학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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