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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마셔서 죄송합니다, 디오니소스 님!

시작은 아르헨티나 멘도사의 소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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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때문에 와인을 찾았노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나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주신들과 친하게 지낸 전력이 있다. 그리고 신들은 내게 호된 신고식으로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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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술 마시고 토했다면서요? 해장에는 역시 아르헨티나 스테이크죠.

 

제발, 술은 얌전히 마시자


외국에 나가면 꼭 그 지역의 술을 마셔보는 것으로 여행의 단편을 채우는 부류가 있다. 그 여자도 그중 하나다. 터키에서는 포도를 증류해 얻은 전통주 라크 Rakı를, 스페인에 가서는 청포도를 발효해 주정을 강화시킨 지중해의 와인 셰리 Sherry를 마셨더랬다. 볼리비아에서 병째 들고 다니며 사람들과 나눠 마신 술 이름은 싱가니(Singani, 무스카토 포도를 증류한 볼리비아 전통술)라던가? 마실 줄도 모르면서 그 동네 술이라면 우선 입에 부어 넣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기가 찬다.


뜨거운 태양 아래 포도가 익어가는 고장, 멘도사는 와인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마트에만 가도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은 물론 보데가(Bodega, 스페인어로 와인 저장 창고, 즉 와이너리를 뜻한다) 에서 자존심을 걸고 만든 고급 와인까지 만날 수 있다. 동네 와인샾에 가면 술의 내력까지 들을 수도 있고 그도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직접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 사이를 움직이며 시음하기도 한다.


와인이 비싼 술이라고? 천만에! 와인 산지의 장점은 돈이 부족해도 와인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포도 수확 축제인 벤디미아 Vendimia가 열리는 3월이면 ‘포도의 여왕’이 되고픈 아가씨들이 한 표 달라고 길거리에서 마구 나눠주기도 하며, 그저 배가 터지도록 마시고 싶은 이라면 옛날에 어른들이 양조장에서 들려 막걸리 받아 먹듯이 5l짜리 와인 한 통을 물값보다 싼 가격에 사 오면 될 일이다. 아무튼 동네에 와인이 널려 있는데 그 여자가 그걸 그냥 놔둘 리 없다.


한국에서는 마시기 쉽지 않은 말벡Malbec 와인이라며 한 병 손에 잡으면 놓질 않았다. 뚜껑을 딴 순간부터 산화가 시작되니 한시라도 빨리 마셔야 한다는 것도 이유였다. 주량이랄 것도 없는 미천한 술재주라 마시다 보면 금방 취하고,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마시려니 분에 넘치게 과음을 했다. 그러다 보면 입으로 마신 술이 다시 입으로 나오고. 읔! 그 여자가 아름다운 와인의 고장으로 멘도사를 기억하는 동안 나는 남의 집 침구에 쏟아낸 보라색 국물을 닦아낸 기억으로 여행의 단편을 채워야 했다.


과거에 병나발 좀 불고 다녔던 자신을 반성하려는 것인지 지금의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고 당당히 떠들고 다녔는데 하루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어쩌자고 그런 무모함을 입 밖으로 쏟아냈을까! 그 여자가 침대를 와인 빛으로 물들일 때마다 내가 뱉어낸 그때의 말들이 생각났다. 침대 시트를 벗겨내며 지금 이것은 어쩌면 이게 다 업보이고, 그때의 말을 이렇게 닦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 여자에게 맛으로 여행을 회고하라는 것도 아니고 술에 얽힌 에피소드로 책을 쓰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얌전히 마셔 주었으면 할 뿐이다. 추억을 쌓는 자신만의 방식이니 뭐라 하긴 싫지만 늘 이런 식이라면 함께 여행하는 사람은 외국에서 침대 시트를 빨다가 ‘와인으로 오염된 침구 세탁을 통해 알게 된 나라별 섬유의 특성’이란 논문을 쓰게 될 판이다.


10월이 되니 날이 바뀌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하늘은 짙은 푸른 빛이다. 그리고 늦은 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니 바야흐로 술 마시기 좋은 계절이다. 그러니 주당들이여! 과음하지도, 토하지도 말자. 치우는 사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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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코르크를 땄으니 여기서 끝을 봅시다.

 

 

주신酒神을 만나다.

 

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와인이 좋아서 멘도사까지 찾아간 건 아니다. 시작은 1인분에 1kg이라는 아르헨티나 소고기를 먹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의 식탁 위에는 와인이 꼭 함께였다. ‘와인과 같이 먹으면 소고기가 열 배쯤 맛있어지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이 아르헨티나의 와인 고장으로 향하게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비옥한 대지를 품은 아르헨티나 멘도사. 안데스 산맥을 타고 흐르는 풍부한 물과 일조량 그리고 건조하고 온화한 기후가 이 도시를 손꼽히는 와인 생산지로 만들었다. 게다가 고지대의 청청함 덕분에 병충해에 약한 포도를 생산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프랑스에서 키우기 어려웠던 말벡 Malbec은 안데스에 와서야 제대로 된 와인이 될 수 있었다.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인 남미는 3월이면 가을이 시작된다. 매년 이 시기, 열흘간 열리는 포도축제를 보기 위해 20만 명의 사람들이 멘도사를 찾는다. 1936년부터 100여 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낸 포도에게 경배를 드리며 각 마을을 대표하는 미인이 출전해 퍼레이드를 펼치고 2만 여 명이 야외극장에 운집해 그해의 포도 수확을 기원한다. 한 번쯤 ‘와인 술독’에 빠져 보고픈 이들이 있다면 3월의 멘도사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평소 그 남자와 나의 주량은 엇비슷하며 술을 대하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 년에 한두 번 한껏 기분이 달떠 만취를 하는 날이 있고 그 밖에는 맥주 한 두 잔 정도에서 끝을 낸다. 다만 외국에서는 극명하게 태도가 달라진다.


여행지에서는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한 잔 더’를 외치게 하는 마법과 같은 공기가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렇다. 나는 외국에만 나가면 정신없이 술을 찾는다. 그러니까 평소 아폴론적 인간이었던 내가 여행지에서는 술을 찾아다니며 디오니소스적 도취 때문에 무질서의 인간으로 변모하고 마는 것이다. 멘도사에서는 매일 주신酒神과 접신해 황홀경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소고기 때문에 와인을 찾았노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나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주신들과 친하게 지낸 전력이 있다. 그리고 신들은 내게 호된 신고식으로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했다. 나는 신들로부터 어떤 술이든 멈추지 말고 끝까지 마시라는 무언의 압력을 받았다. 그럼으로써 각종 술의 신을 접신하고 그 종류만큼이나 달라지는 주량을 확인해야 했다. 이 고된 여정 끝에 나는 와인을 한 병 다 마시면 자는 도중 일어나 반드시 먹어낸 걸 토해 낸다는 웃픈 사실도 발견했다. 술에 취한 나 대신 이불이며 옷을 빨아주는 그 남자가 무슨 죄가 있겠냐 만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나를 도와 함께 와인을 마셔주었더라면 이런 사단은 안 났을 거’라며 민망한 마음에 남자에게 되려 큰소리를 치고 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을 디오니소스 신의 기운으로 가득 찬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술이야말로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접신을 가능케 해주는 요물인 셈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가끔 와인을 찾는다. 그때와 달라진 거라면 아폴로적인 이성이 디오니소스적인 충동과 감성을 살살 달래가며 산다는 점이랄까? 더는 이불을 보랏빛으로 물들일 만큼 마시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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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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