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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 괜찮다. 나는 작가니까

김윤정의 『아이슬란드 컬처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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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 중 어느 쪽이 좋으냐면, 추운 나라가 좋다. 사람 역시 더운 나라 사람과 추운 나라 사람 중 어느 쪽이냐면, 추운 나라 쪽이다. 생은 기본적으로 매몰차다는 것을 알며, 맥주의 참 맛을 알기 때문이다.

 

 

8.19.


덥다. 너무 덥다. 몸이 처지고, 타이핑을 하는 손가락마저 무겁다. 책장 하나 넘길 힘이 남아 있는지 의문일 정도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 글을 쓰기도, 읽기도 싫다.
작가란 무릇 글 속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올해의 더위는 사람을 동물적 존재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기로 했다.
나는 작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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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구스미 마사유키가 쓴 『낮의 목욕탕과 술』을 읽었다. 그는 익히 알려진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 이번엔 ‘한낮에 오래된 목욕탕만 골라가서 몸을 씻은 후, 낮술을 하는 탐방기’다.
이 책에서 훔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그건 작가의 기획력도, 취재력도, 문장력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작가의 ‘낙천적이고 느슨한 인생관’이다.
나도 조금 더 느슨하게 살기로 했다. 하여, 우선 ‘신의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혹독한 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폭염에 지친 아내와 아기를 달래기 위해, 조금 무리하여 야외 수영장이 압권인 강릉의 특급 호텔을 예약했다.
사진 속 수영장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훌륭하다.
야외 수영장에서 더위를 비웃으며, 맘껏 헤엄칠 요량이다. 더위야 덤벼라!
내가 며칠 뒤에 맘껏 비웃어주마. 하하하.

 

8.23.

경포대행을 기대하며, 그간 버틸 여행 책을 하나 샀다. 더위엔 추운 나라에 다녀온 이야기가 제격이다. 하여, 산 책은 『아이슬란드 컬처클럽』. 부제는 ‘아이슬란드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법.’ 부제뿐 아니라, 책 표지에는 커다랗게 인쇄된 활자가 있다.  
‘아이슬란드에서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고, 
뮤직페스티벌에 가고, 
예술가의 마을을 찾고, 
서커스단을 쫓아다니다 실패하는 이야기.’
말과 설명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설명은 사소하고, 무용할 것 같다. 간혹 아름답기도 하고. 나는 이런 ‘쓸데없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다. 강릉에 갈 생각을 하니,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아기를 태우고, 처음으로 지방에 가야 해서 카시트를 샀다. 원래는 80만 원이 넘는데, 아내가 할인 이벤트에 당첨돼 60만 원 조금 넘게 주고 샀다고 했다. 휴가 갈 날이 하루 더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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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4. 


 아이슬란드는 10명 중 1명이 작가라니. 대단하다. 실로, 대단하다. 그럼, 도대체 책은 누가 읽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더 대단한 것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는 것이다. 그럼, 10명중 1명이 작가고, 10명 중 9명이 독자인가?

또 놀라운 사실은, 독서 프로그램이 TV 황금시간대에 편성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들으니, 10명 중 1명이 작가이고, 독자는 10명 중 10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10명 중 1명은 작가이자, 독자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어제 한 공중파 방송국에서 새로이 편성하는 독서 프로그램에 출연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미팅을 했다. 교양프로그램인지라 예상 시청률이 낮고, 시간대도 올빼미형 인간이 아니라면, 보기 힘든 늦은 시간에 할 예정이었다. 아이슬란드와 한국은 너무나 다르다. 여러모로 부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내게는 경포대의 야외 수영장이 있으니까.

 

 

8.25. 

12년 된 내 차로 강릉까지 가려니, 아무래도 두렵다. 아기를 태우고 가려니, 긴장도 된다. 하여, 카센터로 가서 점검을 받았다. 그냥 점검을 받기에 미안해서 일단 윈도우 브러시를 교체해달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무상 점검을 부탁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주인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친절한 사장의 권유로 앞 타이어 전부와 상향등을 교체했다. 그는 정직한 주인답게, 다른 건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역시, 그는 신뢰할만하다. 총 39만 원이 들었다. 주인이 시원하게 1만 원을 깎아줬다. 내게 “잘 다녀오세요” 하며 손도 흔들어줬다.

 

 

8. 26. 

 

날씨가 이상하다. 갑자기 코끝에 서늘한 바람이 분다. 오늘 하루만 일어나는 이상기후 현상이겠지?

 

 

8. 27. 


젠장. 춥다. 완전한 가을이다! 신이 ‘아, 내 정신 봐! 그간 너무 더웠지? 지금이라도 싸늘하게 해서 8월의 평균기온을 맞춰줄게’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틀 뒤면 강릉에 갈 예정인데, 그때엔 비가 내리고, 바람도 강하다고 한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기상청은 자주 틀리기로 유명하니까…….

 

8. 28.


『아이슬란드 컬처클럽』을 완독했다. 책은 정말 예상대로 무용하고 아름다웠다. 이율배반적인 표현이지만, 실로 그랬다. 『아이슬란드 컬처클럽』이 내 불안한 기분을 조금 달래주었다. 하여, 이 치유의 기분을 좀 더 느끼기 위해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로스’의 영상을 찾아봤다. 물론, 맥주도 마시며.
추운 날, 아이슬란드의 평원에서 야외 공연을 하고 있는 시규어로스. 그리고 그 공연을 보고 있는 볼이 빨개진 주민들이 인상적이다(나도 내일이면 추운 날, 비바람을 맞으며 볼이 빨개져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겠지…. 아, 입술도 시퍼렇게 되겠지…).
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 중 어느 쪽이 좋으냐면, 추운 나라가 좋다.
사람 역시 더운 나라 사람과 추운 나라 사람 중 어느 쪽이냐면, 추운 나라 쪽이다.
생은 기본적으로 매몰차다는 것을 알며(어쩌면 야심차게 호텔을 예약하면 날씨가 배반한다는 것도 알지 모른다), 맥주의 참맛을 알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운데도, 꾸역꾸역 맥주를 마시는 인간들이 진짜 맛을 아는 유형이다.
날씨가 추운데도, 굳이 야외 공연장에 자리를 깔고 누워 팔베개를 한 채 즐기는 관객이 진짜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날씨가 추운데도, 굳이 야외 수영장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헤엄치는 인간이 진짜 수영을 사랑하는 유형이라기보다는 그만큼 본전이 아까운 것이다. 

 

 

8.29.


아내가 눈을 뜨자마자 희망에 차서 내게 말했다.
“여보. 강릉에는 오전에만 비가 내릴 예정이래요!”
 ‘그래! 오후에는 햇볕을 맞으며 수영을 할지 몰라!’
우린 서둘러 힘차게 준비를 했다. 아내와 함께 열심히 카시트의 자리를 교체하고(카시트가 가죽 좌석을 상하게 한다고 하여, 아내가 4만 원을 주고 가죽시트 보호형 매트를 샀다), 아기 우유병 걸개를 걸었다(이것 역시 샀다. 얼만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자, 이제 출발!
땀이 난다. 좋은 징조다!
서울의 외부 기온은 28도.
이 땀은 절대 내가 긴장해서 나는 땀이 아닐 것이다. 더워서 나는 땀이다. 그렇다. 오늘의 날씨는 덥다! 기쁘다. 이 휴가를 위해서 차에만 자그마치 백만 원 넘게 썼다. 숙박료를 제외하고 말이다. 물론, 기름도 가득 넣었다!(아, 그럼 백만 원에 …… 아, 됐다.)
도로는 시원하게 뚫린다. 강변북로를 달리고,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선에 진입을 했는데도 시원하게 뚫린다. 그리고 마침내, 영동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주목할 만한 문구가 하나 보였다.
 “평창올림픽의 성공개최를 위해 영동고속도로 구간 전면을 공사합니다!”
 이 야심찬 문구 아래 수많은 차량들이 거북이처럼 줄지어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거북이 중의 하나가 됐다. 아내도. 아기도.
 이때의 감정은 생략한다.
 그저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으으…….
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으…….
아랫글은 아름다운 모국어를 써야 하는 소설가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감정을 정리한 후의 일들이다.
차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카센터 사장이 바꿔준 상향등이 이상한지, 깜빡이를 켤 때마다 깜빡이가 조증환자처럼 미친 듯이 점멸한다. 소리도 시끄럽다.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계속하여 오줌을 싼다. 방귀 냄새도 독하다. 차에서 외부 온도를 보니, 14도. 창을 열 수도 없다. 비는 세차게 내린다. 바람도 분다. 대관령답게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아내가 말했다.
“풍경이 우리 운명 같네요.”
(아내는 소설을 많이 읽어 종종 문학적인 대사를 한다).
서울에서 출발한 뒤, 꼬박 6시간 반 동안 운전을 했다.
호텔에 도착해 마침내 야외 수영장을 보니, 수면은 방금 이별한 여인의 눈물처럼 펑펑 쏟아지는 빗물에 강력히 진동했다. 수면은 거센 바람에 마구 흔들려, 잠시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여보! 저…저거. 파도는 아니지?!”
 춥다. 너무 춥다. 완전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작가니까. 적어도 쓸 이야기는 생겼으니까(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래도, 내일 체크아웃하기 전에 수영을 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8. 30.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일어나 조식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은 전화기가 떨렸다. 
 “폭풍, 해일로 인해 위험이 예상되오니……”
 재난경보문자였다. 휴가에 재난 경보라니!
 체크아웃하는 순간까지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대신 원고 마감은 했다. 괜찮다. 나는 작가니까. 원고 마감을 했다면, 이걸로 다행이다(라고, 또 자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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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민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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