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법전보다는 ‘여행 책’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복창!

노비 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 문장)

 

그들 (잉카인)은 평범하고 통속적인 신체를 타고난 만인과 약간 다른 신체를 가진 불구자를 비교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애했다. 이 같은 경향은 인도에서도 발견된다. 힌두의 신들은 대체로 기형이다. 불구의 육체로 태어난 남자는 자신의 신체적 특성에 의해 일반 백성과는 다른, 즉 신에게 좀 더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하며 성직에 참여한다. 여기에 인도만의 불가사의한 사상이 담겨있다.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청어람 미디어, 60쪽


여행 시즌이다. 서점의 여행 책도 대목이다. 그 한 철에 내 기여의 정도는 거의 빵점이니 많은 여행작가들에게 송구할 따름이다. 남들의 평균보다 더 많은 여행 경험을 가지고 있고, 대한민국 평균 독서량 보다는 좀 더 많은 책을 읽는 듯하지만, 실상 나는 거의 여행과 관련 된 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여행기자 또는 여행작가라는 한 동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이력으로 인해, 마치 요리사가 자기 집에서는 부엌칼을 들지 않는 심리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고, 10년 전 가이드북을 하나 써보겠다고 오뉴월 뙤약볕에 청바지 오백 벌을 말린다는 발리 섬에서 온 몸에 땀띠가 나도록 고생했던 트라우마 탓도 있어서겠으나, 결정적으로는 배 아프기 때문이다.

 

남 좋은 구경한 이야기를 내가 왜 배 아프면서 봐야 해? 라며 심술이 엠보싱 화장지처럼 뽈록뽈록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가이드북의 그 지난한 노동은 존중해 마땅하다. 그리고 실제 여행 책에서 자기 여행 자랑하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말도 안 되는 편견이다. 그럼에도 배 아픈 건 배 아픈 거다.)

 

9788985673440.jpg

가이드 북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나는 이 책 이후 더 이상은 노땡큐했다. 너무 힘들어서.

 

나는 여행지에서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내 짐의 3할은 책 일 정도로 바리 바리 싸 들고 가기를 좋아한다. 어느 정도 심하냐면 꽤 오래 전 지리산 첫 종주 때 용산 역에 모인 일행 들은 서로 음식을 나눠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배낭은 이미 만삭이었다. 사람들은 걷고 걷고 또 걷다 장터목 산장에서 이제는 당신이 챙겨 온 음식을 먹자고 했다. 배낭 속에서는 거의 천 페이지에 달하는 『호치민 평전』과 그 비슷한 두께의 책 서너 권이 나왔다. 주변에 다른 등산객이 없었다면 나는 산장 근처 어딘가에 생매장 당할 분위기였다. 

 

크기변환_1.jpg

지리산에서 못 읽어서 얼마 후 베트남 배낭 여행 갈 때 내 배낭 속을 채운 책

 

그러한 압박과 탄압에도 나는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말한,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더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는 주장을 거의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그 대화를 촉진하는 것이 바로 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가 편안하게 날아가는 동안에,  통유리 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여행지에서 여행지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읽을 책이 배낭 안에 있을 때 안도하고, 책을 들고 있을 때 편안하며, 그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 누군가 말하기를, 그럴거면 그냥 도서관이나 갈 것이지 왜 돈과 시간 들여 여행을 오냐고 하는데, 그러게 말이다.  근데 이것도 취향이니, 내 대답은 그저 ‘홧 캔 아이 두?’.

 

그나마 읽은 여행 책도 나는 거의 대부분 길 위에서 읽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곽재구의 『예술기행』 『별 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읽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책들은 외로워야 더 맛이 나는 것들이었다. 타이완 서쪽 마공(馬公)섬을 여행하면서 이병률의 『끌림』을 읽었다. 글과 사진이 너무 좋아 아껴가며 읽었다. 인간을 향한 작가의 그리움과 애정이 절절해, 그 책의 어느 귀퉁이에 이런 메모를 했다. 

 

“한 권의 예쁜 여행 일기장과 사랑에 허기진, 그러나 투명한 눈으로 인화한 사진첩의 감흥. 여행 중 만나는 안개비처럼 공항 대합실의 지루한 시간에 감성의 촉촉함을 선물해 줄, 아주 적합한 책.”

 

김형경의 심리 에세이 『사람 풍경』도 동남아 어디를 여행하면서 읽은 책이었는데, 여행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고 그 책만 오래 남을 정도로 내게 좋았다. 김훈과 박래부가 엮은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는 국내 문학 기행을 하며 밥처럼 끼고 다닌 책이다. 박완서 선생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여행문학의 진수라 생각하기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즐겨 선물하는 책이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홀로 여행자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법이라고. 그러하기에 여행자가 여행지에서 쓴 글은 삶의 성찰이 별처럼 가득한 거라고. 

 

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여행작가들에게 특별히 미안해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 동안 복통을 참아가며, 나도 모르게 몰래 몰래, 당장 공항으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대며 (결국 이것 때문이었다. 읽으면 역마살이 도지는 병), 사고 읽은 책이 내 서재에 꼿힌 백 여권의 여행서다. 

 

최근 읽고 있던 책은 『여행의 순간들』이다. 일본 여행작가의 신화적 존재이자 한국에도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후지와라 신야의 32개 여행 에피소드가 묶여 있는 책이다. 70년대 한국을 여행할 때 부산에서 돌 돔을 속여파는 가게 주인에게 멋진 한방을 먹이는 장면도 재미있고 꽃으로 낚는 고기인 발리의 구라미 이야기도 환상적이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말을 하는 작가다. 그래서 어느 부분은 생각의 차이로 반감도 생기지만 기록을 하는 것만이 아닌 생각을 하는 여행책이어서 나는 거칠고 투박한 생 칡을 씹듯 그의 책을 질겅거리기 좋아한다. 특히 얼마 전 있었던 교육부 나모씨의 개돼지 발언 때문에 이 책 속에 나오는 ‘인도의 불가사의한 신체’ 에피소드가 강렬하게 남는다.

 

에피소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주지하다시피  인도의 인간차별은 악명이 높다. 색깔과 직업을 기준으로 2천 개 이상의 신분으로 나뉘어지고 하층민들의 박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인도의 신분제는 좀 기이한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경우다. 이 반음양은 가장 하층 계급이다. 그런데 인도는 이들을 살아가게 하려고 제도를 만든다. 바로 히즈라 라는 직업이다. 결혼식이나 제사 때 음악에 맞춰 흥을 돋우는 일은 오로지 반음양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다. 

 

크기변환_dhaka-393-1.jpg

반음양

 

나는 나모씨의 망언을 접하며 이 대목을 떠올렸고, 내가 지금 인도 뉴스를 보고 있나 헷갈렸고, 그런데 인도는 가장 하층으로 분류된 불가촉에게도 직업 보장을 통해 살 거리를 만들어준다는데 1%인 너님들은 99%의 개돼지에게 먹고 살게는 해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는 생각도 들면서 이럴 때는 관련 기관에 직접 물어봐야 새 나라의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어 교육부에 전화를 걸었으나 뚜뚜뚜뚜 통화 중 신호만 종일 나오면서, 교육은 미래를 바꾼다나 어쩐다나, 교육은 사람을 바꾼다나 저쩐다나 하는 안내 음성만 내내 들어야 했던 것이다.

 

l_2016070901001157200091801.jpg

출처_ 경향신문

 

나는 우리 머리 좋은 나으리들이, 사시 행시 척척 붙느라 법전 딸딸 외우며 고생 많이 했으니 기업에 빨대 꼿아 내 배 채우는 뻘 짓 하거나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 따위의 엄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짬짬이 배낭 여행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다. 이 땅 밖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홀로 여행자의 신분으로 느껴봤으면 좋겠다.  애국 애족하느라 공사다망해서 여건이 안 된다면, 삶의 고뇌와 반추로 가득한 여행 책이라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혹여 그런 것은 너무 가벼워서 고전 같은 것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여기 맹자님 말씀 한 줄 올려놓으니 식전 식후 각 6회씩, 양치 전후 각 6회씩 도합 12회  꼬박 꼬박 읽을 것을 권한다. 구의역 사고로 숨진 젊은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위선이라는 이와 그 것에 동조하는 같은 부류에게 전하는 맹자의 말씀이다. 

 

지금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을 보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 지역 사회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며, 우물에 빠지는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관찰해보면, ‘ 측은해하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하략.<맹자 孟子> <공손추 公孫丑] > <상上> )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복창!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오늘의 책

아직도 플라톤을 안 읽으셨다면

플라톤은 인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고 평한 화이트헤드. 우리가 플라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아직 그의 사유를 접하지 않았다면 고전을 명쾌하게 해설해주는 장재형 저자가 쓴 『플라톤의 인생 수업』을 펼치자. 삶이 즐거워진다.

시의 말이 함께하는 ‘한국 시의 모험’ 속으로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46년간 한국 현대 시의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한 문학과지성 시인선. 이번 600호는 501부터 599호의 시집 뒤표지 글에 쓰이는 ‘시의 말’을 엮어 문지 시인선의 고유성과 시가 써 내려간 미지의 시간을 제안한다.

대나무 숲은 사라졌지만 마음에 남은 것은

햇빛초 아이들의 익명 SNS ‘대나무 숲’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2학기의 어느 날. 유나의 아이돌 굿즈가 연달아 훼손된 채 발견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소문과 의심 속 학교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온,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소문 속 세 아이의 진실 찾기가 지금 펼쳐진다.

성공을 이끄는 선택 기술

정보기관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며 최선의 의사결정법을 고민해 온 저자가 연구하고 찾아낸 명확한 사고법을 담았다. 최고의 결정을 방해하는 4가지 장애물을 제거하고 현명한 선택으로 이끄는 방법을 알려준다. 매일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나를 바꿀 최고의 전략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