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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지친다

『번아웃 키즈』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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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비록 독일의 저자가 쓴 독일 청소년의 이야기지만, 많은 부분 한국의 교육환경, 부모와 자식 사이를 데칼코마니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만의 특수상황이 아닌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생존하려는 부모들의 경쟁과 마음은 어디든 똑같다. 아이가 다 타버려서 번아웃이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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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우리와 큰 차이가 없었다

 

A는 긴 머리에 키가 크고 예쁘장하고 맵시 있게 옷을 입었다. 진료를 하면서 나는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한 아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내게 과로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A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성적은 뛰어났고, 어릴 때부터 쭉 그래왔다. 1년 전부터 점수와 결과에 대한 걱정이 늘어났고, 학습량도 늘렸다. 대학 입학 능력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도 A의 노력을 지지하지만 너무 노력은 하지 말라고 만류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은 노력을 하지 않고도 성적이 잘 나올 정도로 똑똑하지 않으므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부터 A는 심각한 수면장애와 집중력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때로는 이유 없이 울음이 발작처럼 나왔고 극도의 절망과 슬픔, 그리고 분노가 동시에 밀려왔다. 마음속에는 암울한 미래를 그린 시나리오가 펼쳐져 있다 보면 어느새 새벽 1시 반이고 6시 반 자명종이 울리기 한참 전에 이미 눈을 뜬다. 하루를 축 처지고 피곤한 채 시작한다. 요새는 식욕이 뚝 떨어져서 엄마는 A가 거식증이 아닌가 걱정을 할 정도였다. A는 중산층이고 부모는 변호사로 집안에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있지 않다.

 

여기서 A는 누구일까?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등학생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내가 진료실에서 많이 만나고 있는 학생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아이의 이름은 ‘안나’, 독일인이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병원의 아동청소년 심리연구소장이자 정신과의사인 미하엘 슐테-마르크보르트가 쓴 『번아웃 키즈』에 나온 사례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은 헬조선이고, 유럽의 교육 시스템은 너무나 훌륭하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잘 자라면서 자신의 꿈과 희망, 진로를 개척해나가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스칸디나비아식 교육 방법이 최고의 대안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독일도 우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아니 일부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꽤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한 국가에서는 교육 문제와 아이 키우는 문제는 얼추 비슷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평등한 기본적 교육을 이수하는 부분은 나라 별 차이가 있지만 큰 경쟁은 없다.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지향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엘리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의 경우는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나,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다수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경쟁은 세대가 지날수록 심화가 된다. 독일은 10세 중반에 김나지움(독일의 중등교육기관)에 일단 들어가는 수준의 학력이 있어야 대학 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트랙에 들어간다. 그러니,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10대 초반부터 부모와 자녀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특목고, 자사고와 같은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 중학교 때에 선행학습과 내신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다 보니, 너무 빨리 달리기 시작해서 인생의 본 레이스는 시작도 하기 전에 제풀에 지쳐버린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안나와 같은 상황의 아이들을 『번아웃 키즈』 (Burnout kids)'라고 이름 붙였다. 말 그대로 ’다 타버린 아이들‘이란 의미다.


아이가 다 타버려서 번아웃이 되면 말짱 도루묵


‘번아웃’은 스트레스 개념을 처음 만든 한스 셀리에의 ‘일반적응이론(general adaptation theory)'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개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처음에는 갖고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서 역량을 강화하는 ’경고기'로 시작해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이전의 반짝하는 반응이 전보다 덜해지는 ‘저항기’로 넘어가고, 마지막으로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별 반응을 하지 않는 소진기(burnout period)로 넘어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용어가 현대사회에 만연된 스트레스로 지친 사람들을 설명하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이 책의 저자는 이와 같이 땔감이 다 타버려서 기름을 부어도 불이 강해지지 않고 먼지만 풀썩이는 상황이 된 소진기가 어린아이와 청소년기에도 충분히 많이 관찰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집중을 해나가지만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면서 집중력 저하가 생기고, 잠을 자기 어렵고, 각종 신체 증상이 생긴다. 많은 청소년들이 무력감을 호소하고, 몸과 마음이 탈진된 상태가 되어 진료실을 찾아온다.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학구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에서 두드러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번아웃 징후가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왜냐하면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다 잘해야 하는 것이 일부의 목표가 아니라 모두의 일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뿐 아니라 음악도 해야 하니 마음은 조바심이 난다. 음악을 썩 잘하거나, 즐기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음악도 해야 좋은 김나지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아이와 부모 모두가 믿기에 즐거워야 할 일도 스트레스가 된다. 마치 학교를 다니는 것이 빡센 직장을 다니는 것 같은 부담이 되어버렸다. 어른들이 주당 노동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부담을 느끼듯이 매년 아이들이 평균적으로 해내야 할 과제가 누적되어 늘어나는 것이 독일사회의 일반적 경향이라 저자는 비판한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부모 또한 실패자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편입되어있기 때문에 시스템 밖으로 던져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1 목적이 된다. 그러니,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다른 길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대부분의 부모가 “우리도 아이가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기를 바라지 않아요”라고 말하지만 큰 흐름에 휩쓸려가는 것은 속수무책이다.

 

아이들은 이런 큰 경향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열심히 하려고 한다. 착한 아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헌신적으로 자신의 학생이라는 ‘직업’에 전념하지만 그 대가는 과부하, 긴장, 탈진이다. 이것이 번아웃의 전제조건이 되는데, 어른과 달리 아이는 ‘이건 아니야!’라면서 떨어져나와 자기 주관으로 버텨낼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욱 더 많이 번아웃이 될 위험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오면서 불안, 우울증으로 진단받기를 원하지 아이가 지능이 낮거나 학습장애가 있다는 통보를 더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감정의 문제라면 일시적이지만 지적 문제라면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말하며 부모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자신의 가치를 아이에게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세심한 무관심을 가지려고 노력을 해야한다고 조언한다. 부모의 불안은 아주 쉽게 아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고 의도적으로 애써야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지치지 않고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충분한 자극과 이완, 재미와 즐거움, 신중함과 무모함, 성적과 배우는 즐거움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아주 원칙적인 면을 지켜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 번아웃에 빠지고 나면 다시 회복되기란 쉽지 않다. 회복되기에도 오래 걸리고, 부모의 기대에서보면 이미 다른 아이들은 저 멀리 달려나간 다음 뒤처진 위치에 아이는 서있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아이가 번아웃이 되어 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 책은 비록 독일의 저자가 쓴 독일 청소년의 이야기지만, 많은 부분 한국의 교육환경, 부모와 자식 사이를 데칼코마니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만의 특수상황이 아닌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생존하려는 부모들의 경쟁과 마음은 어디든 똑같다. 아이가 다 타버려서 번아웃이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럴 때일수록 요새 유행하는 말,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 지금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한 번 자신과 아이를 바라보면서 되뇌여봐야할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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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키즈 미하엘 슐테-마르크보르트 저/정지현 역/이승욱 해제 | 문학동네
이 책은 단순히 ‘번아웃 키즈’라 이름 붙여진 새로운 병증에 대한 보고서이거나 그에 대한 치료 과정을 담은 자료가 아니다. 아이들에게로 점차 퍼져가고 있는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을 파악해서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생활여건을 만들어주자는 변화의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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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번아웃키즈

<미하엘 슐테-마르크보르트> 저/<정지현> 역/<이승욱> 해제13,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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