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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이 누구든 형사는 자기 일을 하지

요코야마 히데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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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 생애 최장 연속 독서 시간 기록을 경신했다. 이전에는 미쓰다 신조의 『흉가』를 읽을 때 걸렸던 2시간 30분인데 『64』를 계기로 5시간으로 늘어났다. 지극히 현실적인 형사물 『64』는 형사물이자 직장 생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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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미스테리

 

"어떤 분야의 책을 좋아하나요?"라는 물음은 "당신은 유물론자입니까, 관념론자입니까?" 만큼이나 일상 생활에서 듣기 어려운 질문이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사회라서가 아니라, 원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없다. 나 역시 그러하여 저런 질문을 던진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는데, 대학 입시 면접 때와 입사 면접 때 저 물음과 맞닥뜨리긴 했다. 그 때 답으로 철학, 역사, 종교, 사회학, 심리학, 정치경제학이라고 말했지만 지금에야 고백하자면 뻥이었다.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물론 인문 사회 쪽 책을 간혹 읽긴 하나 중2병 심했을 때 존재 증명 차원에서의 독서였고 책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 작품은 주로 추리소설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빨간 표지가 인상적인 문고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한 권씩 모으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에르큘 포와로는 그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잠들기 전 포와로와 함께 미지에 빠진 범죄를 수사하는 상상을 하는 건 남들에게는 털어놓지 않는 나의 사소한 취미였다. 몽상 속에서 범인은 주로 회수권 빼앗는 유도부나, 가르치기보다 때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들 손에 수갑을 철컹철컹 채우는 순간, 묘한 쾌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작품은 장편 66권, 단편집 20권으로 방대하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형사가 다르고, 전개 방식도 상이하나 대개는 패턴이 있다. 사건(대개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명탐정(주로 에르큘 포와로)이 등장해서 범인을 추적한다. 헤이스팅스 대위와 같은 조력자는 포와로의 천재성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결말 부분에서 명탐정은 사건 관계자를 모두 모아놓고 범인은 바로 당신, 이라고 밝힌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허허 아재 개그도 칠 자리에서 쳐야지 무슨 소리를.” 하고 되묻지만 결국 명탐정은 범인이 치밀하게 구성한 트릭을 모두 깨부순다.

 

이런 식의 이야기, 그러니까 명탐정이 명석한 두뇌로 범인이 만든 알리바이나 트릭을 깨는 장르를 본격 미스테리라고 한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현대 일본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안 것은 형사물이 본격 미스테리 말고도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신본격, 사회파, 이야미스 등등. 이중에서 나이 먹을수록 끌린 장르는 사회파 미스테리였다. 고도로 분업화되고 첨단 문물이 발전한 이 시기에 명민한 두뇌만으로 범인을 척척 맞히는 이야기에는 공감이 안 갔기 때문이다.

 

 

똥 닦을 휴지는 넉넉해야 한다

 

수사권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나라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명탐정이라는 존재는 비현실적이다. 명탐정이 아니라 명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고도로 분업화된, 대규모 조직이다. 개인 역량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직 전체의 유기적인 협업이다. 형사가 수사를 잘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수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다른 부서 역할도 필요하다. 초동 수사를 위해서는 지구대 일선에서 근무하는 경찰이 존재해야 하고 범인과 추격전이 벌어진다면 교통 경찰도 투입되어야 한다. 이들간 유기적인 협업을 위해서는 조직 내 원활한 소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 경찰서에 신임 경찰서장이 부임한다. 편의상 A라고 칭하자. A는 고시 출신으로 주로 경무 쪽 업무에서 역량을 발휘해 왔다. 그는 늘 합리적인 재정 운용과 투명한 공직 사회를 강조했다. A가 부임 후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경무과장.

 

"작년 경찰서 비용을 보니, 타서에 비해 많이 썼어요. 올해는 아껴 봐요."

 

"서장님,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저희는 타서보다 시설이 낙후해 유지 보수 비용이 많이 발생합니다. 올해만 해도 민원실 리모델링 등 큰 공사가 많습니다만. 어떻게 줄여야 할지..."

 

"방법은 있을 거예요. 정 안 되면 화장실 휴지라도 좀 아껴 보세요. 잊지 마세요. 경찰은 국민이 내는 혈세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조직 생활을 해온 경무과장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예산을 줄이진 못하더라도, 줄이려는 액션은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뭣보다 서장이 직접 방법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경무과장은 즉시 비품 담당을 불러 화장실 휴지 구매 비용을 줄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비누와 가글액, 핸드워시 등 화장실에서 줄일 수 있는 건 모두 줄이라고 지시했다. 비품 담당인 B경사는 시킨 대로 했다. 그는 층별 화장실 사용량을 1주일간 수집했고, 가장 사용량이 적은 3층을 기준으로 모든 층에 동일한 양의 휴지를 비치했다. 1층에는 민원실이 있기에 화장지 소진이 더 빨리 이뤄졌다. 당연히 1주일치로 제공된 화장지는 목요일 오전에 이미 바닥난 상황.

 

한편 연쇄 절도범을 쫓고 있던 B형사는 또 야간 근무다. 오늘은 어쩌면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리무중이던 범인이 내연녀 집을 찾는다는 첩보를 막 입수한 터였다. 범인이 꽤 거물인 탓에 첩보를 입수한 순간 아랫배가 아파 왔다. 중요한 순간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B를 괴롭혔다.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를 내렸다. 휴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휴지걸이를 봤을 때 B는 좌절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두고 3분간 고민. 처치하는 데 10초. 그리고 바로 범인의 내연녀 집으로 향했다.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의 CCTV를 확인한 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범인은 B형사가 도착하기 1분 10초 전에 내연녀 얼굴을 본 뒤 떠났다는 것을...

 

 

요코야마 히데오 『64』 지극히 현실적인 미스테리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요코야마 히데오가 쓴 장편소설 『64』는 범죄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조직 내부 논리가 어떻게 수사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분간은 요코아먀 히데오 대표작이자 최고작일 이 소설은 분량부터 어마어마하다. 옮긴이의 말까지 하면 692쪽. 샀을 때는 언제 다 읽지, 생각했는데 첫 장을 펴고는 워낙 흡입력이 강해 5시간 뒤에 옮긴이의 말에 도착해 있었다.

 

제목인 '64'는 쇼와 64년 D현에서 일어난 아마미아 쇼코 유괴 살인 사건을 가리킨다. 결국 미제로 끝난 이 사건은 경찰에는 치욕이었다. 유괴 발생부터 사체 발견에 이르기까지 경찰은 범인에 끌려다니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고, 시효 만료가 코 앞인 상황.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D현을 찾기로 한다. 결코 쇼코 유괴 사건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다.

 

주인공인 미카미는 D현경 홍보 담당관이다. 유능한 형사로서 활약했으나,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경무부 소속 홍보 부서로 배치받았다. 신임 경찰청장 시찰 일정에 피해자 유족 방문이 있으니 이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미카미는 쇼코의 아버지를 만나 설득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상하게 여긴 미카미는 동료인 형사들에게 아마미아 쇼코 사건에 관해 묻는다. 동료들은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물으면 물을수록 경무부의 끄나풀 취급을 당하며 형사들로부터 점점 밀려날 뿐. 14년 전 아마미아 쇼코 유괴 살인 수사 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고, 경무부가 증거를 확보해 조직에서 우위에 서고자 한다는 괴소문을 미카미는 뒤늦게 듣게 된다. 그 증거는 일명 '고다 메모'.

 

경무부와 형사부 사이에서 박쥐 취급 당하는 미카미를 괴롭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으니 바로 기자다. 기자회견 도중 질문을 받지 않고 나간 게 괘씸했던 기자단이 시비 걸 만한 사건이 터진다. 교통사고. 사건 자체는 크지 않지만 임산부라는 이유로 가해자를 익명으로 발표한다. 기자단은 실명을 요구했다. 실명 발표가 아니라면 청장 시찰 보도도 보이콧하겠다는 입장. 신임 청장의 시찰을 홍보 소재로 이용해야 할 경무부는 당연히 미카미를 닥달한다. 교통사고 가해자 익명 발표를 고수하되 기자단이 청장 시찰을 비중 있게 보도할 것.

 

고다 메모를 둘러싼 경무부와 형사부 갈등은 벼랑 끝으로 치닫고, 음으로 양으로 행한 기자 포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답답한 마음 가득 안고 청사를 배회하던 중 미카미는 이상 징후를 발견한다. 수사과에 전화를 받는 최소 인원만 남아 있고 모두가 자리를 비운 것이다. 경무부에 반감을 표시하는 단체 행동이라 추측하고 형사들이 모여 있는 강당으로 향하는 미카미. 형사들은 농성하려고 모인 게 아니었다. 64를 모방한 똑같은 유괴 사건이 발생했고, 강당에는 수사 본부가 세워지고 있었다.

 

 

윗사람이 누구든 형사는 자기 일을 하지

 

대략 이 정도의 내용인데, 두꺼운 분량을 짧게 요약하다 보니 세세하게 다루지 못한 대목이 많다. 경무부와 형사부, 중앙경찰과 지방경찰, 경찰과 기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알력 묘사는 소설에서 다뤄지는 주된 내용인데 경찰 조직이나 취재 관행이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는 한국이기에 술술 읽힌다. 경찰이나 언론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복수의 상사 사이에서 갈등해 본 직장인들이라면 주인공의 언행에 깊이 동감하며 읽어나갈 수 있을 테다. 여기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깔봤던 코딱지가 조직에서 승승장구해 주인공을 앞지른 사연, 외모 콤플렉스로 가출해버린 딸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못 털어놓고 안절부절하는 장면, 투철한 사명감으로 현경 No.1인 본부장에게 찾아가 직언하고는 바로 후회하는 모습 등 미카미의 인간적인 면모도 이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인상적인 대목을 꼽으라면 워낙 많은데, 딱 한 장면만 꼽으라면 이 대목이다. 캐리어(중앙에서 지방에 임명한 고위 경찰을 비꼬는 용어)에게 형사 부장을 뺏길 수 없다고 말하는 미카미와 고등학교 시절 코딱지였으나 지금은 더 잘 나가는 경무부 에이스 후타와타리 사이에 오간 대화다.

 

"본청 뒤에 숨어서 막후의 권력자 행세를 하려고? 그게 지방 엘리트의 소망이냐?"

 

"더 들어야 하나?"

 

"에이스라면 에이스답게 굴어. 캐리어를 형사부장 자리에 앉힐 바에야 네가 앉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인정하라고."

 

(중략)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기호야. 누가 앉아도 별 차이 없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기호? 형사부장이?

 

"그러고도 D현경 사람이냐?"

 

"윗사람이 누구든 형사는 자기 일을 하지. 아닌가?"

 

"엄한 아버지든, 형편없는 인간이든 아버지는 아버지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데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캐리어와는 비교할 수 없지."

 

"한 달이면 적응할 테고, 두 달이면 익숙해지겠지. 인사란 항상 그래." (423쪽)

 

그러고 보니 나도 꽤나 형편없는 인간인데 어쩌다 보니 아버지로서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그런데 익숙해지지 않는다. 육아라는 게 그렇다. 아니면, 공부를 안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육아 책은 안 보고 피 튀기는 미스테리나 보고 앉았다. 공부를 안 한다면 『달님 안녕』이라든지 『난 멋진 형아야』라도 소리 높여 읽어줘야 할 텐데, 반성해야겠다. 미스터리가 얼마나 다양하든, 얼마나 재미있든 아버지는 육아에 열중해야지. 소설 속 주인공 미카미처럼 딸이 가출하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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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요코야마 히데오 저/최고은 역 | 검은숲
14년 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는 유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64’의 담당 형사들을 찾아가고, 사건 후 퇴직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 동료를 보면서 미카미는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중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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